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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Leaver Nov 14. 2024

어떤 장면,

잊을 수 없는


첫 번째 장면/

남프랑스 니스에서는 한 가정집에서 지냈다. 나무로 된 가구에 붉은색 커튼이 달린 집은 따뜻한 느낌이었다. 냉장고 문짝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과 메모지, 현관문 옆 벽면에 달려 있는 열쇠 꾸러미함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상상케 했다. 아이보리색 주름진 가죽 소파 옆엔 먼지 하나 없는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싱크대는 꼭 필요한 것만 꺼내어진 채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꾸밈없고 소박하며 깨끗한 집이었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아담한 내 방은 맨 안쪽에 있었다. 한쪽엔 침대와 작은 냉장고와 테이블이, 맞은편엔 옷장과 책장이 나란히 있었다. 침대에서 바로 보이는 커다란 창은 정원에 풍성히 피어 있는 보라색 꽃을 자랑하듯 보여주고 있었다.




두 번째 장면/

그 집에는 부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있는 동안 늘 나에게 친절했다. 체크인하던 날 나를 위해 주인아저씨가 입구까지 내려와 내 무거운 캐리어를 들어주었다. 언덕을 걸어 집에 올라가 보니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던 중이었는지 테이블 위엔 뇨끼가 담긴 그릇과 과일들이 놓여 있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내가 식사를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그들은 괜찮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이부자리에 대해 사과했다. 예정보다 일찍 간 건 나인데 사과를 들어 도리어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이불은 햇살 아래서 바짝 마르고 있었다.


짐을 풀자마자 바다에 가겠다는 나에게 활짝 웃으며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니스의 바다는 참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가진 파라솔과 바다용 슬리퍼와 돗자리를 내어줬다. 이것저것 더 챙겨주려 하는 것을 가까스로 거절했다.


그들은 내가 외출을 할 때면 어디에 가보면 좋은지 지도를 펼쳐 가며 상세하게 알려주었고, 나갔다 돌아오면 어디에 다녀왔는지, 밥은 먹었는지, 내일은 뭘 할 건지 꼭 물어보곤 했다. 어느 날 밤엔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는데 주인아저씨가 헤드셋을 끼고 작은 텔레비전 화면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그는 이미 들어가고 없었다. 그들의 공간임에도 내가 불편하지 않게 늘 나를 배려해 주는 게 느껴졌다.




세 번째 장면/

내 옆방을 쓰는 아들도 몇 번 마주쳤는데, 그는 낯을 가리는 듯하면서도 마주칠 때마다 나에게 늘 깍듯하게 인사하곤 했다. 그리고 아침이면 주인아주머니가 아들의 방문을 노크하고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려왔다. 그는 집에서 문을 잠그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모르지만, 유추해 보건대 날이 밝도록 일어나지 않는 아들을 엄마가 깨우며 얼른 나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들은 방에서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뭐라 대답했다. 문을 딱 걸어 잠그는 걸 보고 얼핏 ‘사춘기인가?’ 싶어 웃음이 나왔지만, 나도 엄마 아빠랑 살았을 때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곤 했다는 걸 기억해 냈다.

방문을 걸어 잠그는 아들이지만 엄마 아빠와 시간을 자주 보내는 듯했다. 내가 느지막하게 귀가한 어느 날엔 셋이서 작은 식탁에 모여 앉아 피자를 먹고 있었고, 밤늦게 귀가했던 날은 셋이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작은 텔레비전으로 무언가를 굉장히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작은 소파에 끼어 앉은 그 모습이 귀엽고 웃겼다.




네 번째 장면/

그 집에 살면서 내가 좋아했던 것 중 하나는 옆집에 사는 까만 고양이와 노는 일이었다. 사교성이 좋은 그 까만 고양이는 우리 집 테라스에서 넉살 좋게 뒹굴거리기도 하고 때론 뻔뻔하고 도도하게 집 안까지 그냥 들어오곤 했다. 넓은 마당을 여러 집이 함께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고양이에겐 모든 게 자기 집 같았을 것 같다. 내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총총 달려와 발라당 눕는 고양이의 꼬리엔 찐득거리는 풀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풀들을 떼어 주고 그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을 땐 내가 키우던 까만 고양이 석탄이가 떠올랐다. 석탄이도 살아 있었다면 그렇게 발랄하고 철없게 예뻤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섯 번째 장면/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는 항상 나를 설레게 하고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밤엔 어두워서 바다가 보이지 않으니까 아침이 되는 걸 매일 기다렸다. 날이 밝아 현관문을 열면 다시 파랗게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수평선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걸어 올라오는 귀갓길은 어떤 날엔 힘들기도 했지만 집에서도 바다를 내려다보는 행복이 있으니 감수할 수 있었다. 행복은 눈앞에 자주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장면/

오래된 열쇠로 매일 여닫던 철제 대문을 마지막으로 닫고 나왔다. 손에 더 이상 열쇠가 없다는 건 사뭇 쓸쓸했지만 멀리서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에 마음이 금세 따뜻해졌다. 꼭 다시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꽉 안아줬던 아주머니의 품과, 내 짐을 들어주던 주름진 손이 마음에 남아 있으니까.




다시 꺼내어 본 옛날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릴 적 가족들과 유럽 여행을 하면서 국경을 넘을 때 버스를 타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긴 이동 시간이 싫지 않았던 이유는 창밖을 통해 목격한 어떤 장면들 때문이었다. 광활한 풍경보다도 내 마음을 더 동요시켰던 것은 소박한 가정집과 불규칙하게 널려 있는 빨래, 부엌 창 안쪽에 잠깐씩 보이는 사람들, 마당에 널브러진 장난감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걸 관찰할 때면, 당장이라도 버스에서 내려, 집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똑똑 문을 두드리고 자기소개를 한 뒤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창밖의 풍경을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프랑스 남쪽에 있는 어느 바닷가 동네의 가정집에 머물면서, 며칠이나마 방 한 칸에 내 물건들을 가지런히 놓고, 싱크대에서 물을 떠 마시고, 자전거를 타러 나가는 주인아저씨와 인사하고, 또 옆집 고양이와 노는 그 일상적인 장면들을 마음에 새길 수 있어 행복했다. 다정하고 귀여운 어느 가족의 사적인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어서 포근했다. 어린 입김이 서렸던 버스 창문을 뚫고 나와본 세상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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