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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녀왔어“

이 여행은 무엇을 남겼나

by 리버 Leaver



“나 여행 다녀올게.”


가진 것을 놓고 홀연히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직장, 인간관계, 쌓아온 업적, 가지고 있던 물건.. 그런 것들을 뒤로하고 “나 여행 다녀올게.” 하고 말하며 가방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 자유롭고 홀가분해 보이는 그들을 나는 자주 부러워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하게 되었을지. 저렇게 떠나면 어떤 기분일지, 아쉬움은 없을지, 두렵기도 할는지, 또 얼마나 깊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


때때로 나도 모두 다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쌓아온 것도, 가진 것도 많지 않은데 사는 게 무겁고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기고, 더 이상 누구의 품에도 숨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내 인생은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종종 버거웠다. 누구도 내 삶에 기대를 걸지 않고 그저 각자가 알아서 살아가는 나이가 되고서부터는, 나 혼자 내게 기대하고 노력하고 무언가를 이루거나 좌절하는 일이 외롭게 느껴졌다. 늘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나를 아끼는 타인도, 먹여 살려 주는 직장도, 하루를 풍성하게 하는 취미마저도 공허와 버거움을 지워 주지 못했다.


이 정도면 행복한 삶이 아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는 그런 인생을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결핍이 내 안에도 있었다. 그걸 외면한 날엔 행복하다 느꼈고, 똑바로 바라본 날엔 슬펐다. 그것과 눈이 마주칠 때면 산다는 게 필요 이상으로 길다고 느껴졌다.


겉으로 명랑한 내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어쩌면 모두 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2023년의 나는 삶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고 싶었다. “나 여행 다녀올게.”라는 말 뒤로 숨고 싶었다. 많은 게 지겨웠다. 살고 있는 집도, 평생 벗어나본 적 없는 고향도, 대학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얻은 직업도. 뭐든 다 지겨웠다. ‘이렇게밖에 못 사나? 인생이 이게 다인가?’라는 공허한 생각들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나를 지탱하는 사랑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떠나고만 싶었다. 헛된 기대일지라도, 돌아올 땐 무언가 달라진 나를 데려올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니. 그래서 떠났다.




5주 동안 미국과 유럽을 디뎠다. 비장하게 떠났지만, 가끔씩만 무겁고 대부분은 맑았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도,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보기도 했다. 벅차고 황홀한 마음과 뿌리 깊이 외로운 마음을 교차로 느끼며 계속 걸었다.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 헤맸다.


구하던 답을 찾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 같다.


타인의 욕망을 좇을 뿐 정작 나에게 집중하지 못했던 그동안을 돌아보고, 그렇다면 남이 아닌 바로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은 어떤 모양인지 그려봤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진리를 상기하고, 그렇다면 이 유한한 생을 살며 내가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지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의 대답이 들려왔다.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작가라는 일을 해보자.”


그 대답과 함께 또 다른 생각이 따라왔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것은 집이나 직장, 도시 같은 게 아니라, ‘나’, 그냥 나라는 사람 자체였을지 모른다는 것. 관성에 젖어 늘 살던 대로 똑같이 살아갈 것처럼 느껴지는, 무능함이 드러날까 봐 도전하지도 못하는 그런 못난 나였다는 것. 그런 내가 여행에서 수많은 사람과 삶을 마주하고,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야 말았다는 것. 하고 싶은 걸 해 봐도 인생엔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그 확신이 필요해서 여행을 떠난 건지도 모른다는 것.


나의 밑바닥을 보는 것이 두려워 핑계만 대며 주변만 빙빙 맴도는 삶이 아닌,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좌절과 모욕도 받아들이는 삶.

그런 삶 속에서도 권태가 찾아올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된 욕망에 귀 기울이는 삶 속에서 찾아오는 권태라면 그 권태는 내 인생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권태만큼은 긍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습게도 삶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고 싶어서 떠난 이 여행에서, 삶에 적극적으로 부딪치는 방법을 배운 것만 같았다.




“나 다녀왔어.”

라고 말할 땐 이전보다 용감하고 진실된 내가 서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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