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추동하는 비행기의 힘을 느끼며 공중에 떠 있는 동안엔 지상에 발붙이고 있던 많은 것들로부터 멀어지곤 한다. 사사로운 고민들이 희미해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걸 망설이게 했던 잡다한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한시도 떠나지 않던 불안과 걱정도 어쩐지 아득해진다. 몸을 감싸고 있던 아주 얇은 껍질이 한 겹 벗겨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니, 참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인천행 비행기의 창가에 앉아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28,000피트 상공에서 보는 구름이 마치 수평선 같았다. 바다처럼 너른 그 구름 너머로 6월의 이름 없는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노랗고도 불그스름한 빛깔이 검푸르게 바뀌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몇 시간 후면 다시 올 낮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사뭇 아쉬워졌다. 나의 여행이 끝났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여행 내내 나의 화두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가.’였다. 내내 질문했지만, 답이 나올 듯하다가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면 그 선택에 따른 고민들이 제 존재감을 과시하듯 목소리를 내곤 했다.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런데 인천행 비행기에 앉아 있을 때 나를 감싸고 있던 한 겹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어느 자기 계발 서적에나 등장하는 이 뻔한 질문이 불시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내가 일 년 뒤에 죽는다면 그 일 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너무나 자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못 했던 것들을 시도하고, 조금 더 용감하게 살겠다고 답할 것이 분명했다. 나의 이 짧은 생에서 더 이상 망설이지도 도망가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대답할 것이었다.
그 대답 끝에 지난 5주 동안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가 떠올랐다.
“난 사실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작가가 되는 길은 어렵고 또 오래 걸리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해. 그래도 언젠간 꼭 책을 쓰고 싶어.”
여러 번 반복해서 내뱉었던 이 문장들의 의미를 곱씹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난 아직도 하고 싶은 일에 따르는 위험과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었고, ‘다른 길'을 핑계 삼아 진짜 마음이 원하고 있는 건 돌아보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여전히 작가가 되는 일을 미루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생각을 하던 중 어디선가 읽은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메리 올리버 <여름날>
결국엔 모든 것이 죽지 않는가? 그것도 너무 일찍.
내게 말해보라,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이 거칠고 소중한 삶을 걸고
당신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메리 올리버가 나에게, 너의 이 하나뿐인 거칠고 소중한 삶을 걸고 정말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있었다. 언제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삶에 긍지를 갖게 만들 일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동기가 일어나고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일이 있는지, 그래서 삶을 한 번 걸어보고 싶어지는 일이 있는지 말해보라 요구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에게 그건 글을 쓰는 일이었다. 시간을 잊어버리고는 했고, 내 삶의 절반 이상을 좋아했고, 그걸 떼어놓고서 나를 생각할 수 없었으며, 다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해도 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길이 닿던 그 길은, 언제나 나에겐 글쓰기였다. 난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 순간 ‘아, 내가 이걸 찾으러 멀리 떠나왔구나.’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구나.’ 열여덟의 나에게 불쑥 파도처럼 밀려왔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그 마음이, 그 파도의 거품이 아직 쓸려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비행기 차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는 두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그걸 참느라 양쪽 턱이 시큰하게 아파왔다.
공중에 둥둥 뜬 채로, 한 사람이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
나는 행복했고,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슬펐다. 벅차면서도 두려웠다.
정체불명의 그 감정들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만이, 그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