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과일을 사러 가는 길

자두 껍질을 씹으며

by 탄산수

나는 식재료는 떨어져도 '대충 먹지 뭐' 하고 넘기는 불량 주부인데, 과일만큼은 예외다. 야채칸에 사과 몇 알만 굴러다니면 우리집 꼬맹이가 떠올라 마음이 조급해진다. 집에 오면서 무겁지 않은 토마토 한 팩을 급하게 집어오거나, 아침까지 버틸 수 있는 상황이다 싶으면 장보기 앱으로 과일을 사기 위해 주문 금액을 맞춘다. 3살 딸은 전생에 과수원집 딸이었나 싶게 매일 요구하는 과일이 다르다. 그녀의 요구를 다 맞춰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두 종류 정도는 냉장고에 넣어둬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야 아침부터 '땡깡 브레이크'가 걸리는 일이 없다.


이번에는 남편이 과일 세트를 주문해준 덕에 1) 샤인머스캣 2) 거봉 3) 아오리사과 4) 천도복숭아 5) 복숭아 6) 자두 무려 여섯 종류의 과일을 구비해둘 수 있게 됐다. '샤인머스캣 먹을래?' 질문에 딸이 고개를 내저었을 때 자신만만하게 나머지 다섯 과일을 나열할 수 있다니! 꽉 찬 냉장고를 보니 짜릿했다.


하원 후 놀이터에서 실컷 놀고 돌아와 갈증이 났던 나는 의기양양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탐스러운 여름 과일들이 제 자리에서 분홍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과일 부자가 된 만큼 여러 과일을 꺼내 한꺼번에 즐겨보자 싶어 천도복숭아와 말랑이 복숭아 그리고 자두 1알을 꺼냈다. 베이킹 소다로 깨끗히 씻어 쟁반에 두고 딸과 나란히 앉았다.


'이게 천도복숭아고 이건 그냥 복숭아 그리고 이건 자두야, 어떤 게 제일 맛잇어?' 별안간 시식코너 아주머니로 빙의해 맛을 보여주었더니, 자두가 본인 입맛에 제일이라 했다. 그러면서 자두와 천도복숭아의 껍질을 깎을 것을 요구했다. 껍질째 먹는 거라 여러차레 이야기했지만 뻑뻑한 식감이 싫은지 그녀는 칼을 대기를 원했다. 그렇게 33년만에 자두를 처음 깎아봤다.


조그마해진 자두를 썰어 딸에게 건네주고 나는 길쭉하게 잘린 껍질들을 집어들었다. 동그랗게 말린 껍질을 끝에서부터 천천히 입에 넣어 먹고 있자니 딸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접시에 놓인 과육을 먹는 딸 그리고 세 종류의 과일 껍질이 뒤엉킨 스탠볼에서 무언가를 집어먹는 나. 복숭아 씨를 들고 붙어있는 과육을 부지런히 떼 먹던 엄마가 생각났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껍질과 씨에 붙은 과육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렇게 엄마가 되어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 노트북 가방을 메고 샤인머스캣 한 상자와 말랑이 복숭아 한 상자를 양손에 들고 왔다. 늘 조용하게 분주했던 엄마의 마음을 이제야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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