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만난 지 86일째 날이다. 하루종일 곁에 있던 아이는 아빠 옆에서 곤히 잠들고 빨랫감을 개며 텅 빈 거실에 앉아 있자니 불현듯 헛헛한 마음이 확 밀려온다. 공허함을 달래고자 생각 없이 켠 유튜브 영상에 울적한 마음이 뻥하고 터졌다.
내가 본 영상은 개그우먼 김숙이 첼로를 나눔 해주겠다는 한 팬의 집에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 브이로그였다. 중년 여성인 그 팬의 집은 첼로라는 악기가 잘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집이었다. 한쪽 벽면에는 그림 작품이 쭉 전시되어 있고 집주인의 고상한 취향이 담긴 각종 인테리어 소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창문을 열면 롯데타워와 한강이 보이는 전망도 좋은 집이었다.
아들이 첼로를 배우다 그만둬서 나눔을 하게 되었다는 그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듯이 나와 상당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그녀는 마음씨도 좋아서 김숙에게 좋은 갈비가 있다며 고기를 구워주고 각종 찬을 꺼내 식사를 대접하더니 비주얼도 고급진 디저트를 다과로 내놓고 자신의 취향이 담긴 쟁반도 선물한다. 나누는 것이 너무나 익숙한 그녀에게서 따뜻하고 풍족한 마음을 느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내겐 비싸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자연스러운 삶, 거기에 넉넉한 마음씨까지 더할 나위 없는 저런 사람들의 아이는 어떨까. 어떤 것들을 보고 자랄까 생각했다. 나는 우리 아이에게 첼로를 마음껏 배우도록 해줄 수 있는 여유,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라 말할 수 있는 여유도 없을 텐데 하는 울적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는 저 어머니의 삶도 눈에 들어왔다. 여유가 있으니 아이를 키우면서도 본인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겠지? 부러웠다. 요즘 들어 한정된 자원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내가 포기하고 있던 것들이 늘어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야 할까 좌절감이 커서 더 그랬을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고 나에게 수많은 자원들을 투자하고 영위하며 살 산다면 그 삶은 행복할까? 저 집 아들처럼 첼로를 배우고 필라테스를 하고 멋진 옷을 사 입으면 내가 죽을 때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고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절대 아니었다. 평생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아이만 있다면 나는 내 한정된 자원 내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포기라고 이름 붙이기 아까울 만큼 시답잖게 느껴졌다.
적어도 나란 인간은 그렇다.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고 사랑하다가 가면 죽을 때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동안은 성과 중심에 목매어 내가 무엇을 이루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사랑하는 삶 그 자체가 가치 있게 느껴진다. 매일 사랑하며 살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삶 아닌가.
아직 백일도 안 된 아가의 얼굴을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는지 모르겠다. 살면서 누군가의 얼굴을 이렇게 많이 쳐다본 것은 처음이다. 우리 엄마는 날 키우면서 날 얼마나 사랑의 눈으로 들여다봤을까. 그제야 내 마음속 엄마가 사랑으로 키워둔 커다란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엄마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먹고 자란 튼튼한 나무구나. 그 사랑이 무효해지지 않게 내가 나를 이쁘게 봐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과 육아, 내가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진귀한 인생의 기로 앞에서 누구라도 붙잡고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말도 쉽게 뱉을 수 없었다. 무슨 표현이든 상투적으로 되는 것이 싫었고, 애를 낳으라고 하고 싶은데 애를 왜 낳아야 하는지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기가 어려웠다. 애가 이쁘니까, 애를 낳아야 철이 드니까 이런 모든 말들은 그저 아이에 딸려오는 책임감과 일정 부분의 희생을 덮기엔 너무나 막연하고 납득시키기가 어려운 말들이었다. 그 답을 오늘 찾았다. 매일 사랑하며 살고 싶다면 아이를 낳으라고. 인생에서 진한 사랑 한번 해보고 싶으면 낳으라고 말이다.
**2023년 7월 23일에 쓴 글입니다. 출산하고 망가진 몸을 필라테스를 등록해 회복하고 싶었는데요, 아가에게 들어갈 돈이 많을 것 같아 큰돈 쓰기가 무서워서 포기하고 속상했을 때 쓴 글입니다.^^;
ㅣ아기 인스타그램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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