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라는 멋진 직업을 선망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은 피디였다. 딸의 꿈을 찾기 위해 열성인 엄마 덕분에 중학생 때부터 각종 진로 적성 검사는 다 경험해본 기억이 난다. 비싼 검사료가 무색하게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작가와 같은 창의적인 예술가가 되라고. 작가는 내게 친근한 직업이었다. 교내 글쓰기 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경험이 많아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작가하기를 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좀 더 화려해 보이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비슷한 카테고리에 있는 직업 중 가장 멋있어 보이는 '피디'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신이 나서 반 친구들에게 피디가 될 거라고 떠들어대고 다닌 통에 배우 유승호를 좋아했던 전교 1등 친구가 피디가 돼서 가상 부부 결혼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우리 결혼했어요)에 자기를 출연시켜 달라고 부탁한 기억도 있다.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참 귀엽다.
신문방송학과에 떨어지고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피디가 되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찾아보니 명문대 신문방송학과에 가서 방송국에 입사하는 것이 정석 코스였다. 학벌을 많이 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당시 성적이 중상위권이었던 나는 sky는 양심상 노리지 못했고 서강대, 중앙대를 상향 목표를 잡았다. 두 학교의 학생증까지 만들어 공부 플래너에 붙여두는 뻘짓(?)까지 했으니 정말 열성적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자꾸 수학이 발목을 잡았다. 없는 형편에 과외까지 해도 성적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던 중 내신 성적이 썩 좋지 않은 동아리 선배가 작문입시학원에 가서 동국대 국문과에 들어간 것을 보게 되었고 그날로 달려가 학원에 등록했다. 상담 선생님이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과 중 어떤 곳의 입시를 원하냐 물어서 '나는 문창과는 절대 안 가고 싶고 신문방송학과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멋쩍은 미소를 짓던 선생님은 일단 수상 실적을 쌓고 성적을 조금만 올리면 원하는 곳도 넣어볼 수 있다고 희망을 불어넣었고 그때부터 학원의 빡센 스케줄이 시작됐다. 매일 야간자율학습을 빼고 학원에 갔고 가서 글을 쓰고 첨삭을 받고 그 글을 가지고 온라인 백일장에 참여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학원 친구들과 전세 버스를 타고 전국으로 각종 백일장을 다녔다.
말만 들으면 꽤나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피만 튀기지 않았지, 입시에 미친 여고생들의 전쟁터였다. 감수성 풍부하고 예민한 그 아이들이 매일 백일장의 수상 여부에 따라 울고 웃었다. 그리고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쟤가 무슨 대상이야' 하고 서로를 욕했다. 나도 내가 가고 싶은 대학교 백일장에 1등을 하지 못해 공터에서 엄마와 통화하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글이 싫어졌다. 상을 탈만큼 완벽하게 써내야 하는 것, 그래서 내게 엄청난 부담을 주는 것, 그것이 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싫어하는 글을 쓰면서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서울 중하위권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 후에는 내 성적을 탓하면서 문창과와의 인연을 부정했고 여전히 방송국 피디가 되기위해 신문방송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입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대학교 방송국에도 들어갔다.
글은 싫지만 시는 여전히 좋았습니다
이것은 조금 다른 얘기지만 잠시 샛길로 새자면 나는 다른 문창과 전공수업은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유독 시 수업만은 짜릿할 정도로 재밌었다. 시가 별로면 찢어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다는 악명높은 교수님 수업에서도 유일하게 박수를 받으며 살아남은 사람이 나였다. 자랑 같지만 사실이므로 적는 것이다. 웃어도 된다. 내가 왜 시를 좋아했는지 당시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항상 나는 어떤 장면에 꽂혔던 것 같다. 눈길이 가는 어떤 장면에 꽂혀서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글처럼 말이다. (링크 : [삶은 인사이트] 최저가 장례식장, 어떠세요? (brunch.co.kr)) 영영 내 곁에서 쫓아버리고 싶었던 글을 그나마 시가 붙잡아주었던 것 같다.
징글징글해진 글쓰기
하여간 본론으로 돌아오면, 재학 중 잠시 언론사 인턴 기자로 일했을 때도 글은 마음을 다해서 쓰는 것이 아닌 공식이었고 징글징글해진 글쓰기는 졸업 후 더 악랄한 모습을 하고 내 곁에 붙어있었다. 바로 자기소개서 쓰기. 이것을 쓰지 않고 갈 수 있는 회사는 없었다. 나에게 이제 글은 곧 자기소개서가 되었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언론사 입사 시험에서 내가 학력좋은 친구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필력 뿐이었다. 방송국 피디로 입사 준비를 하는 친구들은 각자의 개성이 뚜렷해서 기본적으로 글도 자기 스타일대로 잘 쓰는 편이었기에 더 악착같이 글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울퉁불퉁하고 아주 큰 돌멩이 하나를 작고 예쁜 원석으로 바꾸는 일처럼 끊임없이 만져서 내 맘에 드는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뿌듯해했다. 덕분에 대부분 기업의 1차 전형인 서류에서 떨어져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매번 면접 전형에서 떨어지게 되면서 자소서 쓰는 일이 반복되었고 힘을 팍 주고 마감일까지 가꾸고 가꿔서 내야하는 자기소개서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피디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피하고 싶은 글쓰기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토록 원했던 피디가 되었습니다만
결국 나는 원하던 지상파는 가지 못했지만 채용 담당자의 마음에 든 문구 하나로 당시 나름 전망 있었던 오디오 콘텐츠 회사에 제작 피디로 입사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마다 작가님이 있었는데 회의를 하고 그분이 그것을 정리해 대본을 넘겨주었다. 매주 대본 작업을 하느라 고생하시는 작가님을 보면서 역시나 피디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내심 안도했다.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피디라는 타이틀로 일했는데 마음 한켠에 불편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입사 초반부터 느꼈던 기분이었기에 이것이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라면 당연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1년 전 공황장애가 오고 퇴사를 선언했을 때는 그저 내가 지쳤다고 생각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으니까. 조금 쉬다가 내 에너지를 갉아먹은 이 회사의 환경을 바꾸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 육아휴직을 연달아 쓰게 되면서 나는 다시 이곳에 복귀하게 되었다.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좀 쉬었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여전히 이곳은 내게 우울한 공간이었다. 1년 전과 다를 것 없는 묵직한 공기가 나를 눌렀다. 회사의 문제일까? 분명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왜 새로운 프로젝트를 열 수 있는 기회 앞에서 불안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일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닐까. 모니터를 앞에 두고 복직 첫날부터 글을 써 내려갔다. 나는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재밌어서, 솔직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콘텐츠라 라디오가 좋았고 라디오 피디가 하고 싶었다. 그런데 라디오를 사랑했지만 진짜 라디오 피디가 내 자리였을까 불현듯 생각이 스쳐갔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지속적인 흥미와 자극을 끌 수 있을만한 방송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따뜻함을 전달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나는 그제서야 방송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5년만에 퇴사합니다 '팀장님 제가 목적지를 잘못 설정했어요'
마지막으로 팀장님과 면담을 신청했다. 이 직무가 맞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 같았다. '이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얼마나 했다고 그만 두려하냐. 지금 힘든 건 당연하다' 팀장님은 나의 이야기를 마치 어린 아이의 투정처럼 느끼는 듯했다. 그러면서 예술을 하고 싶으면 손가락을 빨아야 된다면서 바깥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춥다고 한마디를 더했다. 팀장님은 퇴근하는 길 메신저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을 추천해주셨다.
올해까지 발생한 연차를 모두 소진해야 해서 복직하자마자 다시 13일의 휴가를 맞이하게 된 지금, 나는 그간 내가 처한 상황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혼자 해내야만 능력을 입증할 수 있다고 압박을 주는 혹독한 환경과 큰 재능이 없는 업무까지, 열정으로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던 나는 이제야 1년 전 공황장애의 이유를 찾았다. 그렇게 나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글쓰기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년에는 내면에 관심이 많은 나의 관심사를 살려 심리상담대학원에도 진학할 것이다. 나의 미래가 얼마나 빛날지 드디어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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