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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산수 Mar 18. 2024

[D+371] 이상한 독서모임에서 '용기'를 얻다

일을 잘하고 싶은 엄마의 이야기

최근 친한 작가님과 개그우먼 언니를 만나 독서모임을 가졌다. '독서 모임'이라 하면 우아하고 차분한 사람들을 떠올릴테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돌아있는(?) 우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독서모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 근거로 셋이 독서모임 한다는 이야기에 주변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한 프로그램에서 만난 우리는 각기 다른 캐릭터로 서로를 재밌어 하며 사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종종 모여 술을 마시고는 했는데 재작년 초, 셋이 함께한 술자리에서 독서모임을 하자는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왔다.

꽂히면 바로 돌진하는 그녀들은 그 자리에서 독서 앱을 뒤져 '구의 증명'이라는 소설을 첫 책으로 선정했다.

모임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몇가지 규칙도 정했다.


1. 매달 돌아가며 책을 선정한다.
2. 선정한 책은 추천한 사람 외 1인이 찬성하면 진행된다.
3. 약속 전날까지 일정 미루기는 가능하나 범칙금 5만원, 본인이 책임지고 스케줄을 재조율한다.


다들 범칙금 5만원이 무서웠는지, 첫 모임은 지켜야 할 의무감이 들었는지 우리는 미루지 않고 첫 모임을 개최했다. 약속 장소에 먼저 가 기다리며 난 알 수 없는 마음의 일렁임을 느꼈다. 학부 이후 책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부푼 상태였다. 그런데 상황은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대화의 목차가 없다보니 얘기가 두서없이 흘러갔고 대화는 깊어지지 못한 채 겉만 핥다가 끝나게 되었다. 너무나 아쉬운 마음이 들어 다음 모임엔 내가 목차를 짜오리라 몰래 다짐하기도 했다.


잘나가는 그녀들의 일하는 마음

2회 모임도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들의 바쁜 스케줄과 나의 출산으로 인해 모임은 일시정지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작가님이 내가 꿈에 나왔다며 독서 모임을 다시 시작하자고 먼지 쌓인 카톡방을 끌어올렸다. 오랜만에 얼굴들을 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 기대감이 커져 나는 이책 저책을 추천했다. 그러다 작가님의 동의로 '일하는 마음'이라는 책을 두 번째 독서모임 책으로 고르게 되었다.


이 책은 복직 후 '일의 태도'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추천 받았는데, 퇴사와 함께 첫 장을 펼칠 기회를 날려버렸던 책이었다. '엄마'란 정체성을 얻고 일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는 나와 프리랜서로 일하는 방송 작가와 개그우먼, 각자 다른 입장에서 할 얘기가 무궁무진할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책을 읽으며 좋은 글귀를 너무 많이 발견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욕심에 나는 대화의 질문지까지 짜게 되었다.

호기롭게 정리한 다이어리를 들고 나는 상암의 한 냉동 삼겹살 집으로 갔다. 독서모임의 메뉴 선정도 정말 우리답게 우아했다. 모두가 예상했겠지만 삼겹살 집에서는 책을 떠들어 볼만한 시간적, 공간적 틈이 없어서 근황 토크와 간단한 독서 후기만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가는 단골 선술집에 가서야 짐짓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중 인상깊었던 것은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이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일해요

작가님은 나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서 일한다고 했다. 일이 곧 삶의 전부인 작가님은 실제로 현재 정말 잘나가는 프로그램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으며 일하고 있다. 개그우먼 언니는 '책임감'이라 했다. 노견, 노묘를 케어하기 위한 고정지출만 60만원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본인은 원래부터 책임감으로 일했다 했다. 매번 자신의 몫을 성실히 해내는 언니가 할 수 있는 근사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젠 내 차례였다. 이 질문은 내가 미리 준비해왔기 때문에 답을 내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있었다.

나는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 책임감 때문에 일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대답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일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인격적으로 한층 더 성숙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사실 내 인생의 모토인데,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삶의 목표와 일을 목표가 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함께 읽은 책 '일하는 마음'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일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대상인데,
일을 잘하는 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것과 별개의 문제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일하는 마음 >, 제현주, 358p


작가님의 말처럼 나는 일을 하면서 매일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싶다.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위 이야기보다도 전하고 싶은 그날의 대화는 지금부터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 답변에 대한 진위성을 스스로 의심해보게 하는 에피소드다. 그날 그녀들에게 나는 일에 대한 '인정'을 처음 받아보았다. 어떤 일을 하든 내 문제점만 지적하던 상사 때문에 나는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일을 잘 못하는 멍청한 사람이라 스스로 생각했다. 모두가 칼퇴하는 분위기 속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 야근하는 나, 작은 일도 크게 하는 나를 보면서 느리고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녀들과도 함께 일한 사이였기에 내 딴에는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 자신감 없는 뉘앙스가 묻어나왔나 보다. 그녀들은 내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 지면서 '야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너랑 일했는데? 너 진짜 잘해 센스도 있고'하면서 업무와 관련해 디테일한 칭찬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가님은 내 밑에서 들어와서 일해볼 생각이 없냐는 스카웃 제의까지 했다. 진심이었다.

눈물이 찔끔하면서 5년간의 노력을 보상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속상한 마음까지 든다. 열심히 발버둥쳐도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긴 사실이 억울해서다.


서로의 시도와 성취들에 감탄하는 것,
그 감탄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 서로를 향한 최고의 임파워먼트라는 점이다.

<일하는 마음 >, 제현주, 480p

그녀들의 이 말이 퇴사를 하고 길을 찾고 있는 나에게 큰 임파워먼트가 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위로는 그녀들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다는 것에 있었다.

어쩌면 많은 대화에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인정일지도 모른다.

<일하는 마음 >, 제현주, 366p

제현주 작가가 이 문장 앞에 덧붙인 에피소드를 공유한다. 작가가 한 유료 모임 기획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이야기를 나누러 오는 이유가 '말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학교, 회사, 가족 우리가 많은 곳에 속해 살아가지만 사실상 나의 말을 들어주는 공간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거참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도 브런치에 나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담는 것이이겠지. (그리고 좋아요가 눌릴 때마다 '인정'받는 기분을 느끼는 거겠지)

겸손이 미덕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일에 기뻐하면 어쩐지 어린 애 같아서 '인정'받는 일을 속으로만 기뻐해왔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인정'을 갈구하는 것은 아마추어다운 모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정'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인정 받는 일이 엄청나게 기쁜 내 모습을 더이상 숨기고 싶지 않다. 어쩌면 나는 작가님보다 '인정욕구'가 큰 사람인데 멋진 답변을 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ㅎㅎ 그리고 한 유튜브에 따르면 INFP(인프피)들은 특히나 남들과 다른 특별함을 인정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니 솔직한 나의 속내와 자랑을 귀엽게 봐주시길...


그날 그녀들과 헤어지고 그 어느때보다 충만한 마음으로 집에 갔다. 내가 남들에 비해 가진 것이 크지 않을지라도 원석을 보석으로 바꿔갈 힘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참 다행이다.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준 그녀들에게 격하게 감사하다.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딸에게 능력있는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용기가 난다. 노력해서 인정받고 인정받아서 좋은 사람이 되는 일, 그것이 나의 일하는 목표이자 삶의 목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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