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휴학을 왜 이렇게 많이 썼어?”
“중간에 지인들과 작은 스타트업을 하느라 휴학을 좀 했습니다.”
“그래? 뭐 만들었는데?”
“아동 교육용 콘텐츠 개발했고요, 관련 외주들 받는 그런 회사였습니다.”
“아동 교구 제작?”
“아뇨. 앱이요.”
“아직 다니고 있어?”
“아뇨, 작년에 나왔습니다.”
“크흠...”
이 대화는 프로덕트 디자인과 졸업전시를 앞둔 4학년, 30세의 남학생과 프로덕트 디자인 담당 교수님의 대화 내용이다. 교수님의 짧은 탄식 속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었다. 예상컨데 하나는 당장의 졸업전시를 위한 졸업작품 컨셉에 대한 것. 다른 하나는 이미 꽤나 나이를 먹어버린, 전공 관련 대기업 취업과 무관한 경력을 가진 제자의 미래에 대한 걱정 섞인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아마 후자의 비중이 더 컸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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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대는 항상 시간에 쫓기는 삶이었다.
22살의 늦은 입학. 나는 삼수를 했다. 삼수를 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이 때는 뭐해야 해'라는 것에 대해 큰 압박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셨다. 중소기업을 다니시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얼음조각가로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TV에도, 신문에도 여러 번 나온 얼음 조각 분야에 이름이 있던 아버지. 시간이 흘러 힘이 없어진 아버지는 회사의 인사사고를 억울하게 떠넘김 받아 반강제로 퇴사를 하게 됐다. 그렇게 22살의 신입생은 간절히 원하던 합격 문자를 받았고, 학자금 대출을 알아봐야 했다. 입학과 함께 장학금을 받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다. 무식하게 잠 안 자고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하며 치열했던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시청각 정보 운용병이라는 주특기에 지원하여 사진병이 되었다. 정훈실에 배치되어 내 인생 최고의 적이자 친구인 야근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있던 부대는 후방 사령부였기 때문에 행사가 많았다. 때문에 항상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불평, 불만이 많았지만 살아온 인생을 통틀어 참으로 감사한 시기 중 하나가 이 시기였다. 이때 포토샵을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때도 포토샵을 배웠지만, 말 그대로 생초짜였다. 갈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몇 권의 포토샵 책을 외우다시피 공부했고, 군 생활의 반복 숙달을 통해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됐다. 마음 한 구석 ‘나도 할 수 있다’는 든든한 마음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전역을 앞둔 병장들의 마음은 봄바람과 같을 것이다. 차지 않게 기분 좋은 바람, 꽃 내음 섞인 가슴 설레는 바람. 그리고 사회로의 복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묻어있는 황사도 조금 끼어있는 그런 바람. 말년 병장 시절 나의 봄바람은 황사가 조금 짙었다. 환절기, 적응하지 못한 연약한 코가 비염으로 꽉 막혀있는 것처럼 답답한 그런 시절이었다. 그 시절 퇴직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작은 분식집을 운영하고 계셨다. 상병 시절 휴가를 나와 부모님이 일하시는 가게 사정에 대해 들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월세, 관리비 빼면 정말 작은 돈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 상병 월급이 10만 원 안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분식집 수입이 내 상병 월급보다 적었다. 전역이 두려워졌다. 그렇게 안 가던 국방부 시곗바늘은 상병 휴가 복귀 후부터 더 빠르게 돌았던 것 같다. 결국 기쁘고 두려운 전역날이 왔다. 전역 후 뭐라도 해야만 했다. 집중할 거리를 찾아야 했고, 나만 뒤쳐진 것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크게 엄습했다. 그즈음 가장 친한 친구 녀석이 일자리를 소개해줬다.
당시 정부에서 청년 창업에 투자를 많이 하고, 눈먼 정부지원금을 찾아 창업 열풍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 친구와 나도 스타트업 창립 멤버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게 되었다. 회사는 주로 모바일 아동 컨텐츠를 제작하는 회사로 움직이는 동화, G-러닝 컨텐츠 개발 등을 했다. 나는 어플리케이션에 필요한 UI를 디자인하거나 컨텐츠에 필요한 일러스트, 캐릭터 개발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작은 회사라 사실상 눈에 보이는 모든 디자인은 모두 내 업무였다. 그렇게 회사의 작은 지분도 받으며 일을 시작했다. 맨 땅에 헤딩하듯이 일을 했다. 그리고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홀로 야근하는 날이 많았다. 첫 월급은 50만 원이었다. 주 5일 출근 중 3일은 사무실에서 잠을 잤다. 출근길만 2시간 거리였기 때문에 그냥 사무실에서 잠을 잤다. 일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전역도 했는데 뭐가 부족했는지 야근이라는 놈이 귀신처럼 달라붙었나 보다. 그렇게 몇 년 뒤엔 월급이 150만 원까지 올랐다. 여전히 시급으로 따지면 최저임금도 안 되는 월급이었지만, 열심히 일 했다. 그렇게 5년을 일 했다. 학업과 함께. 5년이 지나니 일에 대한 개념도 생기고 엉덩이도 제법 무거워졌다. 경제적으로는 항상 부족했지만, 이렇게 고생하다 보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 일을 배우고 경험을 쌓는다는 기쁨, 그리고 당장 몰두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젊은 날의 나에겐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부 3학년이 되던 해 여름, 결국 함께 세웠던 아동 컨텐츠 회사를 나왔다. 빈 손으로.
교수님과의 졸업 전시 관련 면담 후 몇 주가 지났다. 지난 이대역 맵핑 일러스트 작업을 했던, 명동의 광고대행사 대표님께 연락이 왔다.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만날 수 있느냐고.
그 날 나는 광고대행사에 채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