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값싼 인생공부

by 굿대디

“홍대 미대 졸업 예정이시네요. 미대는 서울대, 홍대가 유명하잖아요. 어디가 더 좋다고 생각해요?”

“프로이트는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말씀해보세요.”

교수님이 서울대 출신이신가... 나는 미대가 아니라 조형대인데... 조형대에서는 철학적인 접근보다 실용적인 접근을 더 배웠는데... 프로이트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었구나... 그런데 프로이트 그 사람 약간 변태 아닌가? 땀이 났다. 면접 준비를 잘 못했구나.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면접 중 구두가 답답했다는 것,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던 것,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못한 긴장한 허리에 축축한 와이셔츠가 달라붙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집에 돌아오는 길. 속은 후련했다.

되면 다니는 거고, 안되면 더 이상 학자금 대출 안 받아도 되니 돈 굳는 거니까.

며칠 뒤 문자가 왔다. 나는 또다시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에 접속하고 있었다.


.

.

.


“젊은 사람이 여기 온 건 진짜 잘한 거야.”

“내가 결혼 전에 왔어야 했는데, 정말 부러워.”


대학원 수업시간, 학기마다 선생님들에게 듣게 되는 이야기다. 잘 들어왔다는, 많이 배우고 가라고, 인생이 변할 거라는 말들이었다. 대학원에선 원우 간에 호칭이 선생님이다 보니, 어머니 뻘도 더 돼 보이는 분들에게도 선생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가 지원한 대학원은 그리 유명한 대학원은 아니다. 나는 삼수 시절 무조건 좋은 대학, 이름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 세 번의 입시 중 단 한 번의 하향지원 없이 상향지원만 했었다. 그렇게 입학했건만, 뭐가 다른지 잘 알 수 없었다. 특히나 디자인 계열은 학교 이름보다도 포트폴리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사회에 나오니 알게 되었다. 초면이라면 학교 이름이 나의 면을 지켜주는 부분은 있었지만, 자랑하듯 나 어디 나왔다고 말하는 것도 꼴불견이고, 실무적으로 봤을 때는 학교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대학원에 지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반드시 심리상담사가 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대학원생 중 가장 어린 편에 속했다. 가끔 20대들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4,50대로 구성되어있었다. 삶의 단물, 쓴 물 다 맛보고 오신 분들. 그래서 그런가 아들뻘 되는 나에게 애정 어린 칭찬과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 같다.


공감도 지능이라고 했던가. 나의 공감능력은 썩 좋지 않은 편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라 눈물이 많은 편이지만, 공감을 해서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닌 것 같다. 대학원에서의 수업은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자원하는 사람에게는 교수님께서 직접 상담을 진행하면서 심리상담 기법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자신의 아픔이나 가정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면, 자원하는 사람이 본인에게 꽤나 유익한 것 같다. 왜냐면 이론과 기법을 직접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공부도 잘 되고, 기억에도 잘 남는다. 나는 이왕 입학한 김에 상담도 받고, 공부도 하자는 마음으로 강의의 실습 대상으로 자주 자원했다. 속물스럽긴 하지만, 교수님들의 한 회기 상담 비용만 해도 수십만 원이라는 것도 한 몫했다. 강의를 통해 당황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점차 나를 발견해 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배우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점점 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씩 바뀌었다. 나는 꼭 집어서 스스로 이런 점이 바뀌었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아내는 나의 변화를 확실히 느꼈다고 했다. 사람에게 말하는 법,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졌다고 했다. 한번은 아내가 좋아하는 아빠들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프로그램에 원조 아이돌인 아빠와 아들이 나왔다. 내가 볼 때, 아이돌 아빠의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영 바람직해보이지 않았다. 공부를 하기 전에는 ‘저 인간 왜 저러냐. 개념이 없다.’라고 말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공부를 하고 나서는 ‘저 사람은 자기 아빠한테 따뜻한 경험을 못 받아봐서 저렇게 행동하나봐.’라고 말했다. 아내는 엄청난 변화라며, 대학원이 사람을 바꾼다고 좋아했었다. 심지어 결혼 후(대학원을 결혼 전 1년, 결혼 후 1년 다녔다)에는 잠꼬대도 유해졌다고 할 정도였다. 나는 거의 매일 잠꼬대를 하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는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욕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퇴사 후 대학원을 다니면서부터는 그날 배운 내용을 이야기하거나, 부드럽게 설명하는 듯한 말투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만큼 심리상담 공부는 나에게 큰 변화를 안겨주었다.

학교에서의 공부는 즐거웠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즐거움, 몸으로 느껴지는 이론들, 그리고 숨겨져 있던 나의 원가족에 대한 분노와 감정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공부를 할수록, 나는 어떤 남편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가, 나의 가정은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나의 아내도 그 당시 사회복지대학원에 재학 중이었기에 상담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이나, 미래의 가정에 대해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며, 나는 아내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그 전엔 아내가 했던 말들을 주의 깊게 안 들었는데, 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 꼭 아내가 했던 말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스르륵 자라난 존경의 마음은 존중과 배려로 표현되었다. 자연스레 우리는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대학원 학자금 대출을 갚아가고 있다. ‘그 돈이라도 모아서 더 넓고 좋은 집 사고, 아기의 미래를 위해 저축해야 되는데...’라는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나는 대학원 시절을 가장 싸게 인생을 배운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인생으로 배웠다면, 그 시간과 에너지는 등록금에 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행복하게 내 곁에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연약함과 모자람이 그들에게 상처를 내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가기 벅찼지만 나날이 배우는 것이 많아지고, 깨닫는 것들이 많아졌다. 실습대상이 되면 될수록, 내 자아는 건강해지고 있었다. 건강해진 자아는 힘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힘은 나를 또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keyword
이전 05화막 나가는 커리어, 심리상담 대학원에 지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