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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리허설은 끝났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by 컬러코드


목요일 하루 종일 이어진 1차, 2차 예선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PD님의 본격적인 주의사항을 시작으로 거의 밤 8시 40분이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본선 무대 확정”이라는 결과까지, 믿기지 않을 만큼 빨리 다가왔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금요일에는 평소처럼 일을 해야 했고,
토요일, 바로 그다음 날이 녹화 방송이었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대를 준비할 여유는커녕, 무엇을 입고, 어떤 곡을 불러야 할지도 정리되지 않았다.
예선 무대에서의 떨림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수백만 명의 TV 앞 시청자들을 마주해야 한다니.




KBS1TV는 1방 송사이기 때문에 브랜드노출 심의가 매우 심각하다고 하시며 신발, 옷 등에 브랜드가 있으면 검은색 테이프로 가려야 하니 되도록 괜찮으시다면 오늘 심사한 그대로 옷도 입고 매우 새로운 건 피하라고 하시는 조언. 그리고 인터뷰를 할 수도 있으니 본인의 장기자랑이나 약간의 사연에 대해서 또 쓰라고 하시며 당일날 아침 즉석에서 인터뷰 내용을 알려주겠다고 하신다. 음.. 사실은 특별한 장기가 없는 나는 빈칸으로 비워두었다.

시험에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절 때 빈칸을 못 보는 내가. 얼마나 얼떨떨했으면 머릿속이 정지되었을까.

아빠와 나오는 길에 가족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의견을 묻고 오시기 전 상황들을 또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다시 곱씹으면 머 하나.


남은 시간은 오롯이 단 하루.



더 심각한 것은 15명 대가족이 만나기로 예약되어 있는 ‘엄마의 칠순잔치’였다.

평소와 달리 특별한 날이니까 경치 좋고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음식점에 예약도 해 놓았고

이참에 가족사진도 제대로 인증숏을 남겨보자는 취지로 스튜디오까지 예약해 놓았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그것도 제일 왕누나로 인해 일정이 무산되어야 하다니..

너무나도 미안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그리고 무슨 옷을 입고, 화장은 어떻게 하며, 작은 부분 하나하나까지 갑자기 앞이 막막해져 왔다.

그런데 날씨까지 너무 축하해 주는구나.

‘폭우예상’

부산이 해양도시이지만 비까지 무대를 축하해 줄 줄이야.


일단 빨리 녹화방송일정을 가족들에게 알렸다.

감사하게도 모두들 알겠고 그다음 일정에 대해 방안을 마련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너무 황당하다고..

‘미안~사실 나도 황당해ㅋㅋㅋ’



그런데 준비하시는 분들도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하시니 계획이 있을 텐데 당일날 정확하게 인터뷰어랑 대략 진행사항을 알려주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장기자랑 부분에는 뭔가 특별함이 없어서인지 인터뷰에 대한 말이 있는 사람들은 챙기며 "생각해 봐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나에게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음... 조금 더 많이 나오려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나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좀 풀어볼까? 어떻게 하면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

이왕 그래도 TV출연을 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나와야 하는 게 사람 심리 아닐까. 이기적인 나의 생각 말고 프로그램의 완성도와 전체적인 구성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급! 장기가 별로 없는 나는 자격증 이야기를 보금 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자격증 34개를 작게 출력해서 자랑을 해봐야겠다. 자랑까지는 아니지만 아줌마가 그렇게 많은 자격증이 있자는 것에 대한 놀라움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궁금해하면서 물어보겠지~~라며 빨리 자야 하는데 뜬눈으로 작게 출력된 자격증들을 오리고 붙여서

한 손으로 떨어뜨렸을 때 쫘~라라락~~ 펼쳐질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도대체 전국노래자랑 녹화하러 가는 것도 황당한데 가족들은 지금 무엇하는지 너무 궁금하다고...

그래서 내가 방법을 알려주고 나머지 마무리를 부탁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오리고 붙이고를 하며 완성해 준다. 얼마나 고맙던지...

밤시각이 늦도록....


피부가 좋게 나오려면 빨리 자기도 해야겠고,

그래도 준비는 좀 해가야겠고, (떨리다 못해 이제 굳는 것 같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진다는데

무대에서 미끄러지지는 않아야 할 텐데

오만 걱정이 다 들었다.




본선 무대 당일 아침, 거울 앞에 서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은, 사실 이 무대를 위한 리허설이었구나.”
어릴 적 화장실에서 칫솔을 마이크 삼아 불렀던 노래,
전교생 앞에서 애국가 지휘를 했던 무대,
합창대회,
그리고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던 시간까지.

모두가 이 날을 위한 연습 같았다.



아침 일찍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몇백 석의 좌석이 깔리는 수변공원이었는데

장소가 초등학교 대강당으로 변경되는지 궁금했는데 마침 문자가 왔다.

' 비가 오더라도 수변공원에서 녹화진행을 합니다. 본선 진출자들은 9시까지 오세요'

녹화는 2시부터 시작되지만 리허설 등 오전에 준비할 것이 많다고 하셨다.


"자자~ 여기 모이신 분들은 다 기가 센 분들이니 제 말 잘 이해하실 거예요~"


'아.... 내가 기가 세다고??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반정도 있고, 우이 아이들 같은 초등학생 두 명, 고등학생 팀, 대학생팀, 20대 운동선수, 미술선생님, 경찰관 등 남녀비율부터 다양한 구성을 연령대, 지역안배까지 정말이지 촘촘한 PD님의 합격을 선택하는 눈은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의자 뒤에 번호가 오늘 순서입니다. 다 앉으시고 차례대로 신분증과 통장사본을 제출하세요~

누가 1등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확인하는 것이고, 제출했다고 해서 등수 안에 들지 안 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나중에 발표가 나서 해당되시는 분들은 저에게 다시 확인받으러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점심은 저기서 육개장으로 드시면 돼요~ 시원한 막국수를 준비했다가 비가 와서 변경했어요~

따뜻하게 드시고 즐겨주시면 됩니다.

상 받으려고 하시면 재미가 없어지고~~~ 오히려 분위기가 안 좋아질 수 있어요~"


"우와 남희석이다!"


비가 와서 무대에서 리허설을 하지는 못하고 비를 피한 드럼 옆 천막 밑에서 마이크 테스트 정도의 리허설을 마친 뒤 계속 기다려야 했다. 도대체 어쩔 수 없는 것은,,,,리허설을 하면서도 가사를 틀려버린 것!


'하... 이를 어떡하나....'

"저... 자격증을 좀 준비해 왔는데 인터뷰해도 될까요?"


즉석 요청이었다. 녹화는 2시간을 넘게 하지만 방송은 한 시간 조금 남짓한 시간으로 방송이 되니 편집될 가망성도 높다, 그래도 기회는 한 번뿐, 말이라도 해야 본전을 찾는다는 심정으로.... 아줌마답게 말을 하고야 말았다.


PD님께서는 몇 가지를 물어보시더니 흔쾌히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남희석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더니 인터뷰를 노래하기 전에 하면 된다고~~~~




무대에 오르는 순간, 조명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떨림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한 느낌도 들었다.

다행히 리허설 때는 폭우가 쏟아지더니 내가 노래부를 때쯤에는 소강상태로 딱 좋은 날씨였다.

“그래, 무대는 늘 내 곁에 있었잖아.”


노래가 시작되자 나는 더 이상 ‘예선 참가자’가 아니라
그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나 자신이 되었다.

관객의 반응, 심사위원의 표정 하나하나가 심장을 흔들었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 있음을, 거짓말 좀 많이 보태어 내가 무대에 서기 위해 살아왔음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너무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주문을 계속 걸었다.

1년에 한 번도 노래방 갈 시간도 없으면서~

‘그래, 노래방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무대 옆에서 숨을 고르며 나는 깨달았다.
“내 인생의 리허설은 끝났다.”
그러나 동시에 알았다.


이 무대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앞으로 어떤 무대가 기다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대가 사라지지 않고, 늘 다른 모습으로 내 삶을 흔들어 왔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박수 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노래할 것이다.
내 삶은 언제나 무대를 향해 흘러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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