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태학적 사고법

다치바나 다카시 | 김경원 옮김 | 박영심 디자인씽커

by 컬러코드

다치바나 다카시 데뷔작, 50년 만에 첫 출간
사유의 출발점,

[ 다치바나 다카시, 立花 隆 ]
정치와 사회뿐 아니라 미국의 성 혁명, 우주과학, 뇌과학, 분자생물학, 의학, 디지털, 로봇공학, 인류학 등
지식을 담은 100권이 넘는 책을 남기며 “최첨단 과학을 파고드는 논픽션 작가”였다.
2021년 4월 30일, 지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향년 80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이 책의 일본어판 원서 제목은 <사고의 기술 - 생채학적 발상을 권함>이다.



(요약)


생각의 방식을 바꾸고
문명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고의 기술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현대의 위기 및 '사물을 보는 관점과 사고방식'에 관한 책.

공업 사회의 사고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기술의 사고'다. 카를 마르크스가 '빈곤의 철학'을 비판하고 '청학의 빈곤'을 논했듯, 우리는 '기술의 사고'를 비판하고 '사고의 기술'을 다시 숙고해야만 한다.


이는 하룻밤 사이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첫 실마리로 "생태학적 사고"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생태학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태학적인 관점과 사고방식을 통해 이 세계는 달리 보이며,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꺄?




프롤로그.

생태학이라는 사고법


인류는 진보와 번영을 구가하는 동시에 멸망의 심연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이것만큼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와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느 정도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희망이 있다면, 그 유일한 실마리는 인류가 이제까지 금과옥조로 삼아온 사고방식을 변혁하는 데 있다. 요컨대 생태학을 바탕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생태학적 사고는 어떤 의미에서 인류에게 정신적 혁명을 요구한다 가치체계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혁명을 무사히 통과해내지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


생태학적 시각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려있다.

어떻게 생각해야 생태학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바라보아야 생태학적 시각에 어긋나지 않을까?


사토 에이사쿠, 이토카와 히데오 와카스기 스에유키 지펜샤 잇쿠, 다무라 교사이, 마오쩌둥, 알폰소 카포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바실리 레온티예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정치가, 음악가, 대기업 대표, 범죄조직 제왕, 경제학자 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위의 사람들 모두 각자의 전공에서 생태학적 사고방식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생태적 사고를 했다고 말한다. 생태학자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생태학적 사고의 올바름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1부.

인류의 위기와 생태학


'관계"중심의 생태학

"생태학은 생물과 환경, 그리고 그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의 관계를 논의하는 과학이다"

생태학은 생물학의 한 분야인데, 생태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선구자는 19세기 중엽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1834~1919)이다. 그의 정의이다.


생태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ecology'의 어원은 집과 결제를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오이코스)에 논리는 뜻하는 logos(로고스)가 합쳐진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 economy의 어원과 동일하다. 즉 생태학이란 생물계라는 자연의 경제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물학은 최근까지 자연과학 중에서 지위가 가장 낮았다. 심지어 과학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과학이 과학일 수 있는 조건은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이를테면 논리적일 것, 객관성을 갖출 것, 실증적일 것 등이다. 과학의 특질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논리를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소와 탄소가 결합하면 물이 된다. 이것은 실증성(실험으로 보여줄 수 있다)과 객관성(누가 실험해도 같은 결과를 얻는다)을 가진 법칙이다.


한마디로 생태학은 관계의 학문이며, 생태학적 사고란 올바르게 정립한 관계에 입각한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

생태학이 다른 과학 분야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과학은 '어떻게'에서 출발해 '왜'를 추구한다. '왜'를 추구하여 현상의 인과관계를 살피고 그 바탕에 깔린 원리에 다가가려고 한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왜 떨어질까? 무거우니까 떨어진다. 왜 무거운 것은 떨어질까? 아이작 뉴턴은 이렇게 '왜'를 파고들다가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물리학이든 화학이든 심리학이든, 모든 과학은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한다. 관찰이 깊어질수록 현상과 현상 사이의 상호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상호관계를 정식으로 표현한 것이 법칙이다. '관찰 > 상호관계의 발견 > 정식화' 과정을 귀납이라고 한다. 정식으로 표현한 법칙이 모여 하나의 체계가 완성된다. 이것이 과학이다. 문제는 귀납이기 때문에 현상의 부분을 잘라내어 추상화한다는 점이다.


지식보다는 지혜

우리는 생태학이 주는 지혜를 배우려고 해야 한다.

조각의 종류에는 조상과 소상이 있다. 조상은 돌이나 나무를 바깥면에서부터 조금씩 깎아 형상을 새겨나가는 것이고, 소상은 심 위에 점토를 조금씩 붙이면서 형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생태학과 자연과학은 자연의 실상에 접근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통하지만, 마치 조상과 소상처럼 태도에 차이가 있다.



2부.

생태학은 무엇을 가르칠까?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

이제 생태학이 가르쳐주는 지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지혜 하나하나에는 맥락이 없다. 왜 그런지도 근거를 들어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이것이 사실이고 진리다. 지혜는 원래 그런 것이다. 사실을 더 많이 모으고 더 깊이 있게 통찰할 때 지혜는 지식의 하나로 편입될 수도 있고, 또는 잘못된 관찰에 근거했다는 이유로 버려질 수도 있다.


식물의 성장과 양분의 관계에 관해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폰 리비히는 이른바 '최소한의 법칙'을 내놓았다 꼭 필요한 원소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이들 필수 원소 가운데 가장 적은 양의 필수 원소가 식물의 성장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다른 필수 원소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식물은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건의 원인은 다양하다.

리비히의 최소량 법칙은 생물뿐만 아니라 대상을 더 넓혀 사고에도 응용할 수 있다.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 데 불가결한 인자가 여럿 존재할 때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이 성립한다.

이를테면 모닥불들 피우려고 했는데 불이 붙지 않았다고 하자 불이 붙지 않은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을 살펴봐야 한다. 연료가 있는가? 산소가 있는가? 연료가 발화점 이상으로 뜨거워졌는가? 불이 부는 데 필요한 인자는 이렇게 세 가지다.

따라서 장작이 젖어서 성냥만으로는 발화점 이상으로 열을 낼 수 없었다거나 태우려고 생각한 연료가 불연성 합성수지였다는 식으로 세 가지 요건을 검토해 불 붙이는 데 실패한 원인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불가결한 인자를 쉽게 알아채기는 힘들다. 특히 인간 또는 인간 집단과 관계있는 현상에는 관련 인자의 수가 지나 치게 많아서 무엇이 불가결한 인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적응의 생태학

환경이 바뀌면 나도 바뀐다.

생태학의 주요 개념 중에 "천이"라는 것이 있다.

암석으로 뒤덮인 땅이 있다고 하자. 암석에 정박할 수 있는 식물은 지의류 뿐이다. 지의류가 암석에 붙으면 암석을 약간 침식시켜 토양을 소량 만들어낸다. 그러면 그곳에 이끼류가 자라나 지의류를 밀어내버린다. 이끼류는 암석을 더욱 침식시켜 토양을 더 많이 만든다. 어느 정도 흙의 양이 늘어나면 흙이 수분을 머금어준다ㅣ 흙과 수분만 있으면 작은 종자식물이 자랄 수 있다. 종자식물은 암석을 흙으로 바꾸고, 그 덕분에 점점 더 커다란 식물이 자랄 수 있다. 이윽고 작은 나무가 자라고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숲이 생겨난다. 이렇게 더는 변화하지 않는 안정된 사애에 이르렀을 때 득상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대체로 벌거숭이 암석에서 숲이 생겨날 때까지는 1,000년이 걸리고, 벌채한 땅이나 경작을 포기한 밭이 숲이 되는 데는 200년이 걸린다고 한다.

극상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은 탓에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자연 안에서 만물은 언제나 변하고 있다. 만물의 유전과 윤회가 자연의 본모습이다.


파멸은 중심에서 시작한다.

데드센터 dead center라는 말이 있다. 식물 군락이 대거 번성해 과밀 상태가 되었을 때, 군락의 중심부는 사멸하는 반면 주변부는 살아남는 형태로 스스로 구제하려는 상태를 가리킨다.

문명의 흥망사를 훑어보면 가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마 문명은 헬레니즘 문명의 주변부가 살아남은 것이고, 유럽 문명은 로마 문명의 주변부였다. 그리고 현대 미국 문명은 유럽 문명의 주변부이다.

중국의 역사도 이와 비슷하다.


비슷한 생물이라도 미묘한 차이가 있기에 미묘하게 다른 환경에 사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종이면서도 능력과 본질에서 놀랄 만큼 개체의 차이가 있는 생물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활환경과 노동 환경은 얼핏 하나의 조건처럼 보이지만 미기후와 미세 환경의 차이가 있다. 이것을 제대로 분별해 자신이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을 정하지 않으면 물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노이로제에 걸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직원의 책상 배치를 조금 옮겨놓는 것만으로도 의욕을 되찾은 예도 있다.



순수한 인간의 대명사처럼 호출당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미쉬킨 공작은 급기야 광기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순수함 위에 세워진 문명도 발광 직전의 단계에 와 있다 우리는 더욱 불순해지고 불순한 것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지금 배워야 할 것은 자연의 살과 뼈 본연의 결을 따라 문명이라는 칼날을 요령 있게 휘두르는 일이다. 알고리즘 합리주의라는 성채에 머물러 진지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적'의 움직임에 대응해 움직이는 게릴라 전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합리주의를 근본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


문명이 가장 결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보라는 개념이다. 진보의 방향과 속도를 다시 생각하라. 진보라는 개념을 맹목적으로 신봉해 왔기 때문에 생겨난 결함이다. 진보는 즉자적인 선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방향성이고, 방향과 속도가 올바를 때만 선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옳은 방향과 속도를 구상하고, 그에 맞추어 문명을 재구축해야 한다.


| 박영심 디자인씽커 |
50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에 존경을 표한다.
누구보다 지혜롭게 주장한 사실이 아직도 전달되어 온다는 사실에 무한 감동이다.
이상하게 생물학과 디자인의 답이 없는 관계가 비슷하다는 것이 느껴지고 대상으로 삼는 현상이 지나치게 복잡한 까닭에 그것을 관찰하고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고, 원리의 탐구까지 나가가는데 힘이 든 것이다.
모든 생태계, 디자인의 생태계, 생태학적 사고법으로 응용한다면 근본을 잡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참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keyword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