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 속에서 발견한 나

― 서맨사 하비, 궤도

by 기빙트리

한낮. 책방 창가에 서면,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서리단길의 골목은 여전히 조용하고, 중정 '사월'창문앞에 놓아 둔 작은 화분에 흰 꽃이 피었다.
빛의 결은 조금 다르고, 나무 잎사귀의 각도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서만 느껴지는, 그 작은 차이가 내 하루 하루를 이어 준다.


서맨사 하비의 소설 궤도는 지구를 도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하루를 보내는 여섯 명의 우주인을 따라간다.
그들은 지구의 낮과 밤을 하루에 열여섯 번 경험한다.
“우리는 여기에 있지만, 모든 것은 지나간다.”
책 속 이 문장은 변화를 바라보는 고요한 시선을 내 마음에 심어 놓았다.

우주정거장에서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않아도 풍경이 쉼 없이 흘러간다.
태평양 위로 떠오른 해가 수평선을 넘어올 때, 물결은 금빛 비늘을 덮은 듯 반짝인다.
아프리카 사막의 모래는 낮의 열기를 머금었다가 이내 밤의 차가움 속으로 스며든다.
작품 속 우주인들은 그 변화를 창 너머로 조용히 바라본다.
누군가는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만히 눈을 감아 기억 속에 저장한다.

그 장면들은 ‘멈춤’과 ‘흐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움직이지 않음 속에서 변화가 흐르고,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이 자리한다.


책방을 지키는 나의 하루도 어쩌면 작은 궤도 위에 있다.
골목길에 스치는 얼굴들, 책방을 개점할 때의 공기, 첫 손님이 들어올 때 울리는 작은 종소리.
오후 햇빛이 책등에 그리는 사선의 그림자와 저녁이 되면 문득 느껴지는 종이 냄새.
모두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하루하루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궤도 속 우주인들은 그 변화를 ‘낯설지만 낯익은 풍경’이라 불렀다.
나는 그것을 ‘어제와 닮았지만 다른 오늘’이라 부른다.
순환은 변화를 품고 있고, 변화는 순환 속에서 빛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고, 그렇게 달라진 나를 다시 만나게 된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인물은 새벽 무렵의 지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그 지나감을 바라보는 마음은 여기에 남는다.”
나는 이 문장을 덮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골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조금 다른 자리에 서 있었다.

내 궤도는 오늘, 고요한 사색의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당신의 궤도는 지금, 어떤 풍경을 지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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