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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ung Lee Dec 08. 2016

L'Ogresse en Pleurs

어느 식인귀의 갈망 그리고 후회 

L'Orgresse en Pleurs 

L'Ogresse en Pleurs

Text : Valérie Dayre

Illustration : Wolf Erlbruch

Edition : Milan

1996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와 <내가 함께 있을게>로 잘 알려진 작가 Wolf Erlbruch(볼프 에를브루흐)의 그림이 일품인 책을 소개해드립니다. 이 책은 다소 잔인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도 아이와 함께 이 그림책을 볼 때면 속에서 야릇한 소름이 돋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출판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상당히 옛날 책이기도 하고요. 


책의 제목을 번역해보자면 <울부짖는 식인귀> 정도입니다. Ogre/Ogresse(여성형)는 잔혹동화나 옛이야기, 전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아버지 크로노스도 자식들을 잡아먹고, 그림형제의 노간주나무(le conte de Genévrier)에서도 간접적이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먹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제가 접한 몇 안 되는 예시들 중) 식인귀들은 남성형이었습니다. 이 책의 식인귀는 신기하게도 여자이고 또 어머니입니다. 책은 시작합니다. "옛날에 어린아이를 몹시 먹고 싶어 하는 아주 고약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가작 맛있는, 그녀에게 완벽해 보이는 아이를 찾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너무 마른 아이도, 너무 뚱뚱한 아이도, 너무 똑똑해 보이는 깍쟁이 같은 아이도, 손이 하나 없는 아이도 모두 부족해 보이죠. 세상은 그녀를 무서워합니다. 부모들도 자신 아이들이 잡아먹힐까 봐, 아이들도 먹힐까 봐 꽁꽁 숨어서 지내지요. 아이를 찾을 수 없게 된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바로 거기서 가장 완벽한 아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보자마자 우적우적 씹어먹어 버리지요. 식욕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리니 자신이 먹은 아이는 바로 그녀의 아들이었습니다. 


텍스트에서 작가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여러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marmot(소년), lardon(고기 기름 조각, 어린아이), marmouset(기괴한 인형, 소년), bambin(어린애), mouflets(어린애), petit(작은애), enfant(어린이), pitchoun(귀여운 애), les drôles(이상한 녀석), moutard(사내아이), gamin(남자아이). 또 주인공 식인귀 아줌마를 가리키는 표현도 다양합니다. femme méchante(못된 여자), maraudeuse(농작물 훔치는 여자), l’affamée(굶주린 여자), la mangeuse(대식가). 사실 이 책의 텍스트는 외국인인 저로서는 상당히 어렵게 써졌습니다. 마치 옛 문헌 속 이야기를 읽는 듯해서 쉽게 읽히지 않았는데요, 위 표현들, 즉 같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글귀에서 이 주인공 감정의 모호함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식욕에 눈이 먼,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여자(어머니)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탁구공이 연상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의 면지와 내지 곳곳에는 줄무늬 작은 공들이 등장합니다. 


텍스트가 전하는 이야기 내용과 스타일도 독특하지만 그림 또한 아주 생경합니다. 치리코(Giorgio de Chirico)의 그림을 보는 듯한 초현실주의풍의 그림은 작가의 콜라주 작업으로 인해 더 빛을 발합니다. 갈색, 베이지 톤의 일러스트레이션과 일본 우끼 요예를 연상시키는 하늘, 그림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달, 파도, 바위, 작은 공들 등은 모두 주인공 여자의 심리, 상황, 이야기의 긴장감 등을 상징, 은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주인공 여자는 보기에도 끔찍하고 못생기게 그려졌습니다. 두 눈은 생기 없는 구슬을 박아 넣은 듯하고 입술은 항시 축 쳐져 우울한 표정만 짓고 있습니다. 매 펼침 면마다 등장하는 달은 제삼자 같기도 합니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모든 상황을 관조하는 듯, 관심 없지만 보고 있는 듯 거리를 두고 있지요. 또한 여자 주인공에게서 보이는 슬픔, 배고픔, 갈망, 절심함을 위로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또한 독자가 그녀에게 느끼는 경멸, 조소, 두려움을 완화시켜주기도 하고요. 




바루 위 장면은 제가 이제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그림책에서도 느끼지 못한 강렬함을 저에게 안겨줬습니다. 전 장면에서 예쁜 아이는 테이블 위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옆에는 꽃병이 있고 북을 들고 있는 원숭이가 있죠. 그리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여자가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꽃병 속 잎, 원숭이는 그대로지만 그 사이에 있던 아이만 없어져 있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먹는 장면 대신 그것을 보고 있는 원숭이, 그 원숭이의 표정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원숭이가 어떤 비명을 지르는지, 이 원숭이가 두드리고 있는 북소리는 어떤 북소리인지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습니다. 눈으로만 즐기는 그림책이지만 여기서는 영화처럼 모든 오감이 다 작동되었지요. 그만큼 충격과 온몸으로 밀려오는 소름도 컸습니다. 제 아이는 이 장면을 보고 우끼끼끼! 우끼끼끼!(원숭이! 원숭이!)라고 재미있어 하지만 전 선뜻 호응을 못해줬습니다. 아이 아빠는 이 책을 아예 아이 손이 닻지 않는 높은 곳으로 올려버렸지요. ^^;


이 책은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끔찍한 이야기지만 책 끝에 가서는 독자에게 일말의 동정과 연민을 느끼게 합니다. 책의 마지막 그림에는 여자 괴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글이 말해줍니다. "오.. 그녀는 울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그녀의 속삭임이 여기저기서 들린다고 합니다. "아이를 하나 주세요.. 제발 하나만, 사랑할 수 있는 아이. 먹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아이를." 여자는 계속 반복합니다. "먹지 않고… 먹지 않고…", "먹지 않고를 반복해서 웅얼거리는 이유는 두 단어가(사랑하는 것과 먹는 것) 혼동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라고 책은 끝납니다. 그녀는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떤 욕망과 욕구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쫓다가, 바로 옆에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의 가치를 보지 못했던 거죠. 그리고 그녀는 뒤늦게야 후회를 합니다. 먹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아이를 다시 찾는 것은 식인귀의 본능과 어머니(여성성) 사이에서 어머니가 되는 것을 선택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열렬히 열망했던 꿈, 욕심, 욕망들 앞에서 우리는 달려가고, 우리들 시야는 점점 좁아집니다. 그리고 과한 욕망과 욕구는 결국 비뚤어진 감정으로 바뀌어 본래의 "사랑"을 죽이게 됩니다. 이 그림책은 극단적인 소재를 택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극단적인 소재로 인해 주인공이 겪는 후회와 슬픔이 독자에게 가감 없이 전달될 수 있는 듯합니다. 



더불어 먹는 것과 사랑하는 이 두 행위가 의미하는 바를 되짚어 보게 합니다. 혹시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이 아이의 천진난만함과 영롱한 영혼을 죽이게 되는 걸 상징하는 걸까요?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르는 한 인간이 겪는 고뇌를 그린 걸까요? 진짜 사랑은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소유하고 싶은 욕구(먹는다는 행위)가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면서 같이하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을까요? 해석은 열려 있다고 봅니다. 쥐와 비둘기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으로 우리는 구체적인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느낄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그림책이 주는 또 하나의 묘미라 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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