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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녜스 Sep 27. 2021

횡성 호숫길, 고향을 그리다.

마이 그린 멜로디

동네에서 불과 몇 해 전부터 시작된 축제가 있었다. 가을에 열리는 횡성 호숫길 걷기 축제.


축제를 생각하면 왠지 엉덩이가 씰룩 인다. 물론 축제 특유의 번잡함과 소란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현실에 더해져 배신감을 주기도 하지만.


축제 때문에 호숫길이 잘 닦여졌으리라. 자연을 벗 삼아 이곳에서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혼자만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서 뗐다.


호숫길은 집에서는 차로 5분 거리였다. 원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매번 지나다니는 길인데도 발길이 자주 향하지 않았다.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초입을 기웃거렸을 뿐이었다.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63 빌딩 옆에 사는 사람이 63 빌딩을 한 번도 안 가봤을 확률이 꽤 높다. 너무 쉬운 것은 애석하게도 자주 저평가된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미세먼지 때문에 깨끗한 공기에 대한 갈망이 커진 것이나, 매일 지겹게 가던 학교가 코로나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하니까 가고 싶어 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후회한다. 쉬운 것들의 낮은 문턱이 흘러간 감사의 대상이 되어버린 어느 날에. 그런 씁쓸함을 하나라도 줄여보고자 나는 어서어서 발길을 재촉했다.


호숫길이 시작되는 부근 주차장에 차를 댔다. 호숫길은 6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숫가를 직접 도는 길은 5구간이었다. 망향의 동산이 그 시작점이다.


망향, 고향을 그리워하다.


이전의 방문 때 그저 아름다운 자연을 가까이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고요한 호수 표면은 실로 잔잔했고 말없이 반짝였다. 그때는 그 무언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차에서 내려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오늘은 끝까지 걸어보리라. 마음도 다듬었다. 드문드문 인적이 있었다. 어느덧 오후 4시가 넘은 시각, 내가 들어가는 길을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보라고 여기저기 세워놓은 행정적 차원의 배려는 무시한 채, 그저 발걸음을 뗐다. 온도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무난했다.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 근처에서 온 사람들에서부터 등산복을 입은 방문객도 있었다.


홀로 걷기 시작했다. 무료함을 쫓아보려 귀에 꽂은 이어폰 사이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조금씩 커지다가 작아졌고 그대로 사라졌다. 호수를 조금 돌면 꽃밭이 나온다. 둘렛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입구가 표시돼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곳을 지나다가 문득 왼편에 아른거리는 것이 있었다.


되감기처럼 다시 돌아 나와 왼쪽을 보니 도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혹여나 다른 길이 있을까 발걸음을 옮기니, 도로는 물속으로 이어져있었다.


망향의 동산. 누가 고향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이 아름다운 호수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의아했다. 문득 엄마가 해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횡성 호수는 만들어진 호수야. 오랜 세월 이 터에 살았던 사람들이 호수가 생기면서 이사를 나갔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얘기들. 평온한 산골짜기에 차가운 물이 차 들었다.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는 물속에 고향을 두고 나왔다. 고향을 잃었다. 고향을 잃은 자의 헛헛한 감정을 넣어둘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매일 지고 다니기엔 마음이 꽤나 무거웠을 테니까. 그래서 망향의 동산이 생긴 것이었다. 서울역에 커다랗고 무겁고 험상궂게 생긴 캐리어를 보관하는 보관함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계속 호숫길을 따라 뚜벅뚜벅 발을 디뎠다. 흙먼지가 일어 허공을 잠깐 점유했다. 어느덧 해가 힘을 잃고 불그스름한 기운이 돌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호수를 둘러싼 울창한 숲에 알록달록 단풍이 들어있었다. 횡성호가 누군가의 고향 위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면 형형색색의 단풍을 마음 가는 대로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 위에 실향민의 마음이 그림자 져 있었다.


고향은 지나가버린 세월을 품고 있어 그리운 냄새가 난다. 꼭 젖 냄새나는 엄마품 같다. 과거의 시간이 머물던 공간이 사라졌다. 그리운 냄새는 기억에만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배 한 척을 띄워서 살던 곳 위를 지나가 볼까. 허전하다 못해 애잔하다.


유독, 호수 가장자리 물속에 나무들이 많아 보였다. 어느 산기슭에서 자라던 나무가 간신히 숨만 내쉬듯 목을 빼꼼히 수면 위로 내놓고 있었다. 풍경은 좋았다. 노을이 호숫가에 슬몃슬몃 내려앉아 고요한 호수가 붉은빛을 띠었다.


누군가의 고향은 멀지도 않고 손에 닿을 듯한 곳에 있다. 다만 물에 갇혀 있을 뿐이다. 애석함은 목격자의 몫이 되어 버렸다. 씩씩하던 발걸음이 조금은 무거워졌다. 나를 지나쳐가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고향을 잃어버린 마음을 달래러 왔을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다시는 딛지 못할 고향 땅을 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해서 입구에서 서성이기만 할 수도 있다. 서울역에는 아직 찾아가지 못한 짐이 많듯이. 조용히 호숫가를 돌아 나오는 길, 대답 없는 호수 위 붉은 노을빛만이 쓸쓸히 그리움에 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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