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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녜스 Feb 24. 2020

시골 밤, 그 고요한 판타지

마이 그린 멜로디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 속에서 자정이 지난 시간 북적이는 파리 시내에선 예술가들이 조우한다. 모두의 눈을 반짝이게 만드는 주황 조명 불빛 아래서 신이 나 재잘거린다.


많은 이들이 내일의 태양을 향해 잠이 든 시각, 이 파리의 자유로운 영혼들은 방황한다. 혹은 설렘으로 질주한다. 도시의 밤은 이리도 광장의 조명 아래서 빛난다. 그렇다면 시골의 밤은?대체로 고요하다. 겉으로 보기엔.


시골의 밤은 과연 고요하기만 할까.


이곳에도 방황과 설렘의 시간이 있다. 미드나잇보다 훨씬 이른 9시 혹은 8시부터. 해가 지면 그때가 밤이다.


시골과 도시에는 시차가 있다.


해가 질 때 즈음, 밤하늘에 수놓은 별보다도 반짝이는 온갖 네온사인이 켜지는 도시와 다르게 이곳 시골은 가로등이 주는 불빛 경험만 넘어서면 어둡다.


어디든 그렇게 해가 빨리 진다. 마치 태양이라는 전등 하나만 단 곳도 있다. 드문드문 인적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가로등도 드물다. 산 속은 밤이 되면 그렇게 빛이라곤 별빛 혹은 달빛뿐이다.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이 없는 어둠 속 세상은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파리처럼 내게도 판타지이다.


한밤, 적막 속 산새의 울음소리는 계절을 알려준다. 봄에는 자질구레한 수다를 떨 듯 새가 지저귄다. 겨우내 잠든 산속 고요를 토닥인다. 지저귐의 소요가 드문드문 파고든다. 봄 밤에는 무릇 낮에 핀 철쭉이며, 제비꽃이며, 엉겅퀴꽃의 닫힌 꽃봉오리 사이로 꿈이 새어 나오듯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여름밤, 기나긴 무더운 밤, 선잠마저 깨우는 소란한 울음소리가 반딧불이 주위를 맴돌며 어둠을 밝힌다.   늘어난 냇물이 쉼 없이 흐르며 낮은 곳으로 흐르는 소리는 마냥 청아하지만은 않다. 


어떨 때는 졸졸 거리는 소리에 개구리가 못 잔다고 난리를 치는 듯하다. 아파트 층간소음을 두고 싸우는 윗집, 아랫집을 보는 듯하다. 판타스틱한 액션은 없어도 소란함이 재밌다.


가을밤에는 어떤가. 스산한 낙엽을 서걱서걱 스치는 바람소리가 귀를 스친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꿩인지 다람쥐인지, 이름 모를 산짐승이 산 속을 헤짚고 다니는 게 눈에 선하다.


아직은 먹을 게 풍부한 가을이어서 머지않아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듯하다. 바지런떠는 이들을 보면 왠지 나도 겨울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겨울밤을 자는 것도 아니고,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인간이라고 조금 더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건가. 그리 생각하니 머리를 누일 지붕이 있는 집이 있다는 게, 등 따신 방이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하다.


기나긴 겨밤에는, 영하 15도를 밑도는 날에는 자질구레한 수다쟁이가 입을 꼭 다문 고요가 찾아온다. 가끔 그들의 추위에 떠는 듯한 파동이 느껴지는 듯 몸서리가 처진다. 그러나 이곳에서 겨울을 알아갈 시간을 갖고난 후 겨울밤에 대한 내 착각을 인지하게 되었다. 고요 아닌 고요임을.


작년 봄까지만 해도 나의 기나긴 밤은 환한 조명 아래서 새하얗게 물들곤 했는데, 새하얗고 둥근 뻥튀기를 한입 두입 베어 문 듯 바삭바삭 어느새 내 밤이 줄어들었다.


홀로 소소히 판타지를 누리는 시간이 사계절을 주기로 파동을 친다. 심박수를 그리듯 그 파동이 나의 생과 함께하게 되었다.


이곳, 시골의 밤은 유독 짙다. 그래서 밤하늘 별이 더 반짝인다.


도시에서 당신이 탐닉하는 미드나잇의 판타지는 이곳에서도 메마르지 않고 누군가의 이른 잠을 방해하고 있다. 때로 도시의 밤이 지겨울 때, 당신의 잠을 방해할 시골 밤의 판타지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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