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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녜스 Sep 30. 2021

아낌없이 줍는 밤

마이 그린 멜로디

날이 선선하니 코에 드는 바람이 꽤나 한기 좀 뿌린다. 가을이 왔다. 가을 하면 누구는 살이 찌고 누구는 쓸쓸하다고 하는데, 나는 외할머니와 주우러 다녔던 산밤이 생각난다. 


할아버지 산소에 갈 때나 혹은 시골에 사셨던 이모 댁을 갈 때면 돌아오는 길 할머니와 나의 손엔 밤이며 도토리가 한가득이었다. 도토리야 할머니가 도토리묵을 쒀주시기 전까진 입에도 못 댈 뿐 아니라 머리에 쓴 고깔 같은 꼭지 부분이 이미 떨어져 있는 게 많아서 줍는 게 꽤나 수월했다. 어린 나에게 도토리 줍는 일은 놀이로선 영 재미가 없었다.


그에 반해 밤은 일단 입고 있는 옷에 가시가 많아서 밤 줍는 일에는 요령이 필요했다. 우선 접근부터 대단한 전략이 필요하다. 떨어진 밤송이가 뒤집어 쓰고있는 뾰족한 가시를 피해야 하고, 양발로 요래조래 가시 박힌 겉을 껍질을 잘 벌려야 했다. 밤 송이를 밟지 않게 온 신경을 신발 속 발가락 끝에 모은다. 몇 번을 툭툭하고 껍질을 바깥 쪽으로 요령있게 차면 아기 엉덩이 같은 매끈한 밤이 톡 하고 솟아오른다.  뽁하고 꺼내는 그 맛이란. 중독성이 있다.


어차피 그 어릴 때 도토리 묵을 쑬 줄을 아나, 밤 삶을 줄을 아나 당장에 따서 먹을 수 있는 오디 같은 놈하고는 수확의 기쁨이 주는 차원이 다르니 놀이로서라도 가치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디 산골에서 자란 것 같지만 놀랍게도 나는 생의 대부분을 서울 및 경기도의 도시에서 자랐다. 다만, 시골에서 좋은 추억이 많아서 시골생활에 대한 향수를 가슴속에 어 왔었다. 그 기억들이 항상 기회만 닿으면 시골로, 자연으로 내 발길을 돌리나 보다.


한참 동안 밤 따는 찬양을 했지만 사실 나는 산밤을 막 좋아하지는 않았다. 밤 따는 건 재미가 있었지만 영 맛은 별로일 때가 많았다. 시중에서 파는 농장에서 키운 왕밤은 크고 달달한데, 산밤은 대체적으로 작고 맹숭맹숭했다. 내 침과 턱관절의 노동을 낭비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산밤에 대한 나의 이렇듯 짧은 소견이 바뀌었다. 횡성 밤골에서.


횡성 집은 유독 밤나무가 많은 밤골에 둘러싸여 있다. 마당에도 밤나무가 지천이다. 가을이면 후둑둑둑 송이송이 밤송이가 너도 너도 입을 쩍쩍 벌린 채 떨어져 있다. 거짓말 보태서 몇 말 수준이 아니라 가마는 주웠다. 너무 많아서 이곳저곳에 인심을 써야 처리(?)할 정도이다. 산밤은 원래 작고 야물딱다는데 이곳 밤은 산밤 치고 크고 달았다. 이런 시골의 맛(?)을 볼 때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풍요로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엄마가 신기하다고 하셨다. 매년 추석이 되기 2, 3일 전이면 신기하게 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고. 틀림없는 자연의 시계가 건전지 없이도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생각해보면 나는 숫자로 표현되는 시간이라는 인간이 정한 관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 자연의 시계 속에서 살다 보면, 인간의 '시간'은 덧없고, 부질없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엄마는 전투 준비를 시작하신다. 기다란 농사용 장화를 신고, 팔뚝만 한 크기의 집게를 들면 전투 준비를 마친다. 그 대상은 지천에 널려 나잡아 잡숴하는 밤송이뿐 아니라 어디선가 슬그머니 나타나는 모기이다. 이놈이 아주 사람을 잡는다. 그래서 무릎만큼 자란 풀밭에 들어갈 때는 긴 장화와 긴팔, 긴바지는 숙련된 시골러에겐 코로나 시대 마스크와 같이 필수이다.


하늘만큼 키가 큰 밤나무를 털기 위해선 보통 장대가 있어야 하지만 우리집 마당에선 밤을 털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밤만 감사히 먹는다. 나머진 새가 쪼아 먹든지 다람쥐가 가져가든지 한다.


재밌는 건 이 전투에 종종 다람쥐가 참가한다는 거다. 커다란 밤나무 뒤쪽으로 산으로 들어가는 숲길이 있다. 나무가 우거져서 사람이 드나들기 힘들다. 그 아래로 다람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시골생활을 잘 아는 동네 아주머니가 알려주셨다. 그 뒤를 슬쩍 보니 밤송이, 송이송이가 그득하다. 다람쥐 식량 창고였다.


처음에 몰래 몇 개 훔쳐(?) 올까 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겨우내 먹을 식량을 마련하느라 얼마나 분주했는지 밤 무더기가 쌓여있다. 가끔가다 이곳에서 다람쥐와 눈이 마주치는데 그 경계의 눈빛은 지네 식량을 지키려는 의미였나 보다. 귀여운 녀석들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생물다양성을 존중하며 생태계를 보호하고자 하는 거대한 뜻을 품고 적당히 먹을 양만 우려 한다.


가을만 되면 밤 인심을 그렇게 쓰고 있는데 올해는 밤이 풍년이 아니라 조금 아쉽다. 당도도 좀 낮은 것 같고. 그렇게 달다고 자랑을 했던 밤이 이번에는 좀 싱겁다. 밤나무가 올해는 힘을 좀 빼고 쉬는 텀인가 보다.


누구나 그러하듯 힘 쫙 빼고 조금은 되는 대로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니, 올해가 밤나무에게 그런 해인 걸로. 그래도 항상 아낌없이 주는 밤나무 아래서 아낌없이 줍는 밤이다. 늘 풍요로운 감사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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