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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녜스 Oct 14. 2021

시골길 랩소디: 멜로디 산책

마이 그린 멜로디

도시에서 벗어날수록 한 사람이 서서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점점 넓어진다. 인구밀도상 시골은 몸을 움직일 땅이 넓다. 하늘을 볼 수 있는 확률도 높다. 땅을 밟 기회도 많다.


그뿐인가, 이건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촌스러운 내 취향에는 마당에 고이 길러진 분재용 소나무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개를 쳐드는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등의 상록수가 더 맞는데 이들과 낯간지러운 눈 맞춤을 할 일이 많다.


온실 속의 화초라고 해야 하나, 가시마저 상대적으로 야들야들한 정원 속 소나무와 다르게 우리 집 마당에는 비바람이 휘몰아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가 있다. 그 옆에 잣나무. 사실 이름을 정확히 구별하기 힘든 상록수가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수십 년 세월을 견딘 나보다 어른인 나무들을 바라보다 보면 애정이 생긴다. 나무는 한 자리를 지켜서 더 애정이 간다.


횡성 집은 언덕 위에 올라와 있어서 주변이 훤히 다 보인다. 온통 논이며 밭이지만 그 들판에 계절이 그림을 그린다. 매 계절마다 너무도 다른 모습을 갖고 있어서 줄을 세우긴 힘들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봄과 여름 사이이다.


이런 애매모호한 답이라니. 내가 봐도 까다롭다 싶지만,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미묘하고 세세한 그러면서도 시시각각 쉴 새 없이 변하는 시골 풍경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여줄 수도 있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겨울이 지나면서 어설프게 드문드문 올라왔던 연둣빛 싹들이 자리를 잡고, 녹음 짙어지기 직전이다. 구름이 살며시 껴서 희미한 푸른빛이 도는 하늘 아래 파스텔 톤의 연둣빛 잎들은 일 년 중에 딱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사실 이 때는 이미 흐드러지게 떨어진 벚꽃 잎이나, 갈변 후 미모를 잃고 진 목련꽃잎들이 바닥에 백색 융단을 깔아놓았을 때이다. 흰 꽃들이 앙상한 가지 위에 성급하게 나뭇잎이 피기도 전에 피었다가 질 무렵 뒤늦게 봄임을 알리는 잎들이 내는 연둣빛 잎이 이 시기를 가장 빛나게 해 준다.


봄바람에 살랑이는 잎들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로 난 오솔길을 산책하면서 상념에 잠겨본다. 내가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오늘은 왜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인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물론 백수였을 때는 전혀 의미 없는,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라는 질문들을 던졌다가 다시 질문을 회수했다. 아, 의미 없지.라고 하며 말이다.  


산책하면서 곳곳에서 부는 향의 멜로디를 경험해 본 적 있는가.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할 때 느낄 수 없는 멜로디를. 길 따라 자란 풀들과 그 뒤로 쑥쑥 자란 나무들이 다른 종류가 심어져 있는데, 그 앞을 지나면 나무들이 풀들이 연주하는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들려오는 듯하다.


햇살 아래 길을 들어서서 두 발자국 걸으면 소나무에서 풍겨오는 산뜻한 '솔'향이 귓가에 울린다. 세 발자국 더 걸으면 밤나무에서 쿰쿰한 '미'향이 들려온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더 내딛으면 참나무가 내는 박하향의 '파'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의 달달한 '도' 향이 들리기도 한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시골길을 걸으면 파란 하늘 아래 오선지 위에 소소한 연주회가 열린다. 나만을 위한 연주회이다. 이러니 내가 초여름을 애정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중 시골길 산책도 그 만의 멜로디가 내 마음을 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변주곡을 연주한다. 똑똑 또로로 록. 크레셴도 디 크레셴도. 피아노를 안 친지 이십 년은 다 되어가지만, 빗방울이 대신 연주해주는 멜로디를 들으면 손가락이 움직인다. 허공에 피아노를 치듯 빗소리를 동무삼아 멜로디를 연주해본다.


비가 오면 일부러 우산을 찾는다. 우중산책은 또 얼마나 맛나는지. 저쪽 산마루에 걸린 운무에서 미끄럼을 타는 듯 안개가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다. 아이처럼 물웅덩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참방 발을 넣어본다. 뒤꿈치에 살짝 물방울이 튀겨도 기분이 좋다.


우산을 들고 몇 발자국을 더 지나면 길가에 나무들이 솔방울 끝에 대롱대롱 맺힌 물방울이 조금씩 자라는 게 보인다. 비가 내릴수록 조금씩 조금씩 커지다가 중력을 견디지 못하는 그 순간, 하강한다. 그게 끝은 아니다. 각자의 속도에 맞게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잠깐 대지를 거쳐서 어디론가 사라진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다시 돌아올 것을 알기에.


누가 보면 비 오는 날 왠 미친 여자인가 싶을 수도 있으려나. 우산도 집어던진 채 비를 맞으면서 나무나 들여다보는 모습이 꽤나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래도 개의치 않다. 개구리의 길을 방해할 순 있어도 그들의 길을 방해하진 않았으니.  


비 오는 날의 산책도, 맑고 높은 하늘 아래에서의 산책도 마찬가지로 시골길 멜로디 산책이 주는 의미는 사귐이다.


사실, 시골에 살아도 정작, 이곳이 고향인 사람들은 굳이 산책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농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곳이 사는 곳이자 일터이므로, 막상 시간을 내서 산책을 하는 일이 쉽지 않다. 농번기에나 허리 한번 펴 볼 수 있을까, 도시에서의 고된 삶이 이곳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곳까지 와서 쉼을 찾으러 왔다면, 사람에 조금 지쳐서 왔다면, 자연과의 사귐을 위해 좋은 도구는 산책이다.


그날그날 바람의 컨디션에 따라, 구름의 변덕에 따라, 숲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멜로디를 들으며 자연과 더 가까워진다. 하루 중 약간의 부지런함, 그 대가는 복잡한 생각을 비우고 누리는 생각의 게으름이다.


다리가 아프면 천천히,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가 아니라면 차에서 내려서 두 발로 땅을 딛고 중력과 줄다리기를 하며 걸어보자. 발을 내딛으면서 주위를 둘러볼 때, 잡념이 나를 비껴가고 내가 내 안을 더 또렷이 볼 수 있다. 시골길 산책이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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