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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하지만 하나도 안 괜찮은 날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은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날들

집중해서 단숨에 책 한 권 읽고, 팟캐스트를 듣고,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고, 저녁에 사람을 만나 얘기도 하고 술도 마시며, 원 없이 밤거리도 걸어보고 싶다. 이런 걸 안 한지 아니 못 해 본 지 꽤 되었다. 그나마 서로 스케줄을 조율해야 운동도 할 수 있다. 잠 한번 시원하고 달게 푹 자보고 싶다. 아니 밤 중 수유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 요즘 들어 새벽이면 울면서 일어나 우유를 찾고, 출장 간 아빠를 찾는 애랑 초 저녁부터 기절했다 같이 잠 설치는 그런 일상을 지리멸렬하게 반복하다 보니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데도 매사가 예민하고 모가 난다.



언제 이만큼이나 컸는지 요즘은 싫은 건 싫다고 주둥이 구만리로 쭉 내빼고 삐쳐서 나랑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 휙 돌리며 복잡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아이가 대견스러울 새도 없이, 이 삼복더위에 내가 미리 코디해 둔 옷 마다하고 겨울 양말에 샌들 신겠다는 이 아이를, 자기 몸채 만한 털인형 두 마리를 양손 가득 안고 땅에 질질 끌면서도 죽어도 둘 다 데려가겠다고 우기는 이 상황에서 아이의 얼굴은 앙다문 입술마저 꽤나 결연하고 한치의 양보도 없어 보였다. 아이고 참나 이게 뭐 별거라고 협상을 시도한 내가 바보지.

차 문을 열고 단번에 엉덩이를 카시트에 대주는 날은 로또 맞은 날에 속한다. 벨트를 채울 때 오만 발버둥을 치며 결국은 아랫입술이 삐쭉 마중을 나오는 상황이 되면 운전을 하면서도 어린이 집에 가는 내내 기분을 맞추느라 진을 뺀다. 그 사이에도 시계는 부지런히 9시를 향해 가고 있는 중.



어르고 달래서 어찌어찌 어린이집에 도착한다 해도 출입구에서 교실까지 찾아가는 길까지도 어찌나 긴지 중간중간 들러서 구경해야 하는 관문이 참 많기도 하다. 그 복도 길이 참 멀다. 마지막 관문인 담임 선생님에게 인계해 줄 때에도 단번에 빠빠이를 하는 날은 럭키. 그런데 요즘 들어 다시 눈물의 이별식을 아침마다 거행한다. 교실에 넣어 놓으면 뛰쳐나와 울면서 따라오는데, 나에게 다시 안겨 눈물을 퐁퐁 쏟으며 안 떨어질 때는 내가 지각을 해도 지각을 안 해도 오전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인데.

아이를 직장어린이집에 보내는 나는 남들보다 이미 좋은 환경이라고 예전보다 훨씬 육아하기 좋아졌다고 주변에서 한마디 씩 거드니까 이런 말 하기 솔직히 약간 죄책감 느끼는데, 이게 뭐랄까 이미 살도 많이 찌고 과식 했으니 그만 먹어라 주변에서 만류하는데도, 정작 나는 아무리 먹어도 혼자 허기진 느낌 같은 그런 거.



출장을 자주 다니는 나의 배우자는 출장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거라 말한다. 물론 내가 그걸 몰라서 그랬겠냐마는. 하지만 그건 지방출장, 해외출장, 관외 교육 모두 고사한 나를 허탈하게 만든 그런 가벼운 말 한마디였다. 아이 보면서 일도 하는 게 혼자 힘에 부치니 그런 것을 본인도 알 텐데 어쩜 이렇게나 팩트로 폭행인가. 어머니는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남자는 그렇게 운전하고 지방을 다녀도 힘들겠지만 내색을 안 하는데, 여자는 에너지 고갈되면 축 쳐져서 맥을 못 춘다고 체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호받고 배려받으라는데, (물론 본인 포함이라고 하셨다.) 아니 나를 배려하고 보호해줄 배우자가 서울에 안 계신다고요. 그리고 결정타를 날린 한마디, '네가 덩치에 비해 야무지지는 못하지.' 라니, 아니 어머니 다 맞는 말씀인데요 이렇게 뼈를 때리셔야 하나요. 아니 꼭 오늘 때리셔야 하나요. 오늘은 정말로 하나도 안 괜찮은 그런 날이란 말이에요. (참고로 저희 고부는 서로 할 말 잘하는 사이좋은 고부. 그렇지만 저 말은 하지 못했다.)

하원 후에 아이를 봐주시는 어머니의 고마움을 잘 알기에, 한시라도 빨리 보내드리기 위해  나는 오늘도 칼퇴를 하고 사람들을 집어삼킨 만원 지옥철에 몸을 맡긴 채 두 다리로 '존버'하며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나의 배우자는 차가 막히는 퇴근시간에 움직이는 것보다 안 막히는 시간까지 기다렸다 집에 오는 게 빠르다는데 뭐가 맞는지? 기다란 시간 동안 운동하다 오겠다는데, 어머니 보내드리고 남편 오기까지 아이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 나는, 출장 안 가는 날에도 출근시간도 빠르면서 퇴근까지 늦게 하겠다는 것 같아 왜 이리 곱게 보이지 않는지.



억울한 게 바보입니다만.  나는 오늘도 차 뒷 좌석에서 신발이랑 양말 벗어던지고 장난감 던져 놓고 앞에서 운전하는 나 보고 주워달라는 애랑 잘 지내고 싶고, 회사에서 일도 밀도 있게 하고 싶고, 복직 후 아예 손을 놓아버린 살림도 하고 싶고, (책, 영상, 자기 계발, 운동, 쉼 같은) 과외 일도 잘하고 싶다.

그들을 사랑하지만, 내가 좋아 선택한 삶이지만 오늘은 하나도 괜찮지 않다.

사랑하지만 하나도 안 괜찮다.



추신

나도 다 잘하고 싶거든. 그게 잘 안돼서, 하루 24시간 중에 에너지 쓰며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돼서, 그래서 제일 안타깝고 아쉬운 게 나거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지도못해 #하나도안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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