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할머니가 드디어 우리 아기를 점지해 주셨다
아기를 기다린 시간 3년. 3년 내내 괴로움에 몸부림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쳤었다. 그나마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허탈함과 속상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은 '삼신할미만 알겠지'라는 브런치 북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번의 시험관 아기 시도 끝에 드디어 삼신할미가 우리 딸을 점지해주셨다. 정말 포기하려고 한 순간에 말이다. 아기가 생기지 않을 땐 도대체 '포기하면 생긴다더라 마음 편히 가져라'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야속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포기할 수 있는 건데?'라는 볼맨 소리가 마음에서 솟구쳤다. 그러다 정말 포기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날은 두 번째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은 뒤 결과를 기다리는 초조한 날 중 하루였다. 하루하루 몸상태를 기록했는데 이식 후 4일 째부터 열을 재봤는데 기초 체온이 평소 대비 조금 높았다. 어라? 싶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며칠이 더 지나고 쓸 때 없이 이식 후기를 찾아보다 발견한 글 때문에 펑펑 울었다. 기초체온은 질정 때문에 높아질 수 있다는 것.
유일한 증상이 기초체온이 높은 것뿐이라 이번에도 실패라는 생각이 엄습했고 견딜 수 없이 슬펐다. 남편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내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다. 내가 우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괜찮다고 했다. 진심을 담아서 달래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예지야 나 딩크 카페 가입했어.
딩크 카페에 가입한 남편은 딩크로 사는 삶이 얼마나 유쾌하고 재미있고 자유로운 삶인지에 대해 나에게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이를 좋아하고 가지고 싶어 했던 건 나보다 남편 쪽이었기 때문에 오빠의 '포기'가 너무 미안하면서 고마웠다. 해방되는 느낌마저 조금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이를 가지거나 혹은 딩크를 결정한다는 건 한쪽에서 강요할 수도, 한쪽만 결정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취미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 다 물놀이를 좋아해서 프리다이빙을 배워보기로 했다. 아직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하려면 시간이 꽤 남아있었으므로 프리다이빙 학원까지 찾아보는 설레발을 치지 않기로 했지만 점점 딩크의 삶 또한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또 흐른 뒤 아랫배가 살짝 묵직한 느낌이 들어 혹시나 하고 다음날 테스트기를 해보았다.
두 줄이었다.
펑펑 울고 난 뒤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뻤지만 민망하기도 했다. 어머 이걸 어찌 말한다? 남편에게 나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빠 이거 봐, 이 정도면 두 줄인 거 맞지?
하지만 한 번의 유산 경험은 트라우마가 되기에 충분했던 걸까 우리는 기뻤지만 기쁨을 자제했다. 혹시나 또 더 큰 상처를 받을까 봐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또 흘러 나는 병원을 가고 두 번의 피검사를 하고, 아기집을 보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다행히 우리에게 와 준 자그마한 세포는 열심히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귀여운 세포는 처음 본 것 같았다.
그 세포가 입덧으로 날 괴롭히더니 어느새 15cm가 되고, 1Kg가 넘었다. 눈, 코, 입, 손, 발 영락없는 사람 모습이 되었다. 그것도 우리를 닮은 듯한 아기 말이다.
이렇게 나는 8개월 차 임산부가 되었다.
정말 이번에 안 되면 딩크로 살아봐야지 하는 순간에 우리 아기가 와준 것이다.
삼신할머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