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백구 Feb 17. 2019

사랑에 빠지면 시간은 상관없어요.

영화 <콜드 워, Cold War, Zimna wojna>, 2018

지나간 날들 중 유독 선명하게 기억나는 때가 있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생일날, 교내 문학대회에 참가해 상을 받은 날, 대학에 합격했던 날, 군 입대날, 제대 날, 처음 비행기를 탔던 날, 외국에서 길을 잃었던 날, 첫 직장에 출근하던 날 등 일상이 아닌 특별한 경험으로 기쁘거나 불안하거나 슬펐던 날들은 잊을 수가 없다. 잘 생각해보면 주로 감정이 요동치고 진폭이 컸던 날의 기억에 선명하다. 그중 사랑하는 사람과 겪은 일은 더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했던 날, 사랑을 나눴던 날, 심하게 다툰 날, 헤어진 날까지 그날의 분위기와 감정은 새하얀 눈 위에 첫 발자국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러한 기억은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감정의 파편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다면 어떨까.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의 영화 <콜드 워>는 이 감정의 파편들을 편집해 이미지로 보여준다. 순간순간 강력했던 감정들을 보여주고 비어있는 과정은 관객들이 채울 수 있도록 열어뒀다. 냉전이라는 암울한 시대를 배경 위에 사랑 이야기를 올리고 사운드와 영상 프레임, 카메라 워크로 감정을 드러내며 관객들을 스크린 속에 빠뜨린다.
1949년 폴란드, 음악가 ‘빅토르’(토마즈 코트)는 2차 세계대전 후 살아남기 위해 공산 정권의 지시를 따른다. 정권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빅토르에게 민속음악을 수집하고 발굴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재즈에 열정이 있는 빅토르는 자유를 꿈꾼다.

‘줄라’(요안나 쿨릭)는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민속음악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시골 출신인 척 속여 춤과 노래를 선보인다. 이를 본 빅토르는 음악적 소질이 있는 줄라를 발탁한다.

이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만 폴란드,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다시 폴란드를 거치며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한다.
부모님께 바칩니다.


영화 <콜드 워>는 영화 <이다>로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감독의 5년 만의 신작이다. 영화 말미에 '부모님께 바칩니다'라는 자막이 나온다. 감독은 부모의 강렬했던 40년간의 사랑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부모가 기억하는 사랑을 감정은 그대로 전달하면서 설정과 극적인 사건들을 추가해 아름다운 서사로 완성했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미로운 음악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으로, 제71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감독은 <이다>에 이어 <콜드 워>도 아카데미 포맷인 4대 3의 화면비율에 흑백영화로 제작했다.  <콜드 워>의 흑백 이미지는 모순적인 두 가지 분위기를 전달한다. 영화 제목 그대로 '냉전'의 공기와 그 안에서 사랑을 싹 틔우는 낭만적인 감정의 기류를 함께 담고 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4:3 비율의 화면도 마찬가지다. 흔히 볼 수 있는 2.39:1(시네마스코프) 비율에 비하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좁은 공간은 '냉전'이라는 상황을 형식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 조화롭게 배치된 피사체들을 보면 황홀한 시각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어떤 화면에서 영화를 정지시키더라도 한 장의 걸작 사진을 보는 듯한 완벽한 구도와 인물 배치는 놀라운 흡입력을 발휘한다.


뛰어난 미학적 성취에 비해 이야기는 단순하다. 빅토르와 줄라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헤어짐이 반복된다. 먼저 두 사람은 공산주의 체제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황에서 만난다. 빅토르는 정권의 지시에 따라 민속음악을 채집하고 오디션을 보러 온 줄라와 사랑에 빠진다. 재즈에 대한 열정이 있는 음악가 빅토르는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자신의 음악적 열정을 표출할 수가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떠나려 한다. 하지만 가난을 탈출하는 것이 목적인 줄라는 떠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공산정권에 만족한다. 결국 한 사람은 떠나고 한 사람은 남는다.


이처럼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의 헤어짐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될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첫 이별이 영화 초반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시 만날까. 영화는 그 과정을 과감히 생략한다. 헤어진 뒤 어떻게 지냈고, 서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세월을 보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1954년 프랑스 파리,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민속음악단 공연차 파리에 온 줄라는 빅토르를 찾아왔다. 빅토르는 재즈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지내고 있다. 짧은 만남 이후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진다. 집에 돌아온 빅토르는 함께 살고 있는 시인 줄리에트(잔느 발리바)에게 말한다.


내 인생의 여자와 있었어.


사이사이 생략된 과정은 관객들의 상상이 채운다. 빅토르와 줄라는 파리에서 헤어진 이후에도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난다. 이때 관객들은 생략된 부분에 저마다 사랑했던,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소환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두 사람을 이해한다. 생략이 만든 여백은 관객들을 영화 안으로 초대하는 힘을 발휘한다.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은 그대로 드러내고 경험이라는 각기 다른 기억은 관객이 채워 넣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콜드 워>는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는 순간 완성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이에 대해 "삶에는 숨겨진 원인과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들이 너무 많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 땐 관객들이
자기 삶의 경험으로
그 틈을 채우도록 하는 게
더 낫다.


사랑에서 만남과 헤어짐만큼 강렬한 날이 있을까. 영화에는 빅토르와 줄라의 15년에 걸친 사랑 중 감정의 진폭이 컸던 날만 기록되어 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원인이나 결과는 없다. 사랑이 그렇지 않은가. 빅토르에게 오디션장에서 줄라를 처음 봤던 날, 함께 떠나기로 했던 줄라가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던 날, 갑작스럽게 파리로 줄라가 찾아온 날, 목숨을 걸고 고국에 돌아가 줄라를 다시 만난 날 등은 커다란 행복과 고통의 반복이다. 줄라는 또 어떤가. 자신보다 자유를 원하는 빅토르가 떠나던 날, 파리에서 몰래 음악단을 빠져나와 빅토르를 만나러 간 날, 수용소에 갇힌 빅토르에게 면회 갔던 날 등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강렬했던 감정의 순간들만이 영화에 담겨 있다.

두 사람의 감정 기록 안에서 돋보이는 인물이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빅토르가 줄라와 재회하기 전까지 함께 지낸 시인 줄리에트다. 순간 지나가는 그녀의 대사는 영화 <콜드 워>를 통째로 관통하는 듯하다. 그 대사는 줄라가 줄리에트를 만난 장면에서 등장한다. 파티장에서 줄리에트를 만난 줄라는 "'시게추가 시간을 죽였네' 가사는 좋은데 이해가 안돼요"라며 그녀의 시를 지적한다. 빅토르가 줄리에트의 시에 곡을 쓰고 줄라에게 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제안했지만 질투심에 줄라는 탐탁지 않게 느끼고 있던 차다. 줄리에트는 줄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건 은유예요"라고 말한다. 이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한다.


사랑에 빠지면
시간은 상관없어요.
(the time doesn’t matter
when you’re in love)




이전 13화 결핍한 남녀에게 여우볕처럼 내려온 온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