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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May 12. 2017

진실함이 사랑을 담보하진 않아.

영화 <클로저 Closer>

Hello, Stranger


우리는 '사랑해'라는 말을 해본 적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그런데 '사랑해'라는 고귀하고 소중하면서도 흔해 빠진 이 표현이 언제나 진심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사랑이란 감정은 모두가 똑같을까.
오늘은 좀 덜 사랑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단어가 없어서 그냥 사랑해. 오늘은 어제보다 더 사랑하는데, 사랑 이상의 표현이 없어서 그냥 사랑해. 이 같은 말을 상대방이 듣는다면 어떤 감정일까. 단어 하나하나가 아닌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눈빛, 표정, 말투 그리고 주변을 감싸는 분위기 등을 복합적으로 느끼면서 받아들일 것이다. 사랑한다는 표현은 그런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끼어들 틈도 없이 감정으로 똘똘 뭉친 그런 표현 말이다.
영화 <클로저>는 오로지 본능과 감정에 충실해 행동하는 네 명의 주인공을 통해 논리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이 바란 것은 결국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또, 순수한 사랑이 진실과 길항 관계 놓인 모순적 상황을 보여주면서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 드러낸다.
댄(주드 로)과 앨리스(나탈리 포트만)는 운명 같은 첫 만남으로 함께 살게 된다. 기자 일을 하던 댄은 연인 앨리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 작가로 데뷔한다.

어느 날 댄은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첫눈에 반한다. 안나는 이미 연인이 있는 댄을 거부한다. 이후 안나는 마초적인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웬)와 결혼한다.

댄의 끊임없는 구애로 안나는 그와 연인이 된다. 둘의 관계로 인해 상처받고 배신당한 앨리스는 종적을 감춘 후 스트리퍼로 일하게 되고, 같은 처지의 래리는 앨리스와 안나 주변을 맴돌며 복수를 꿈꾼다.

이들은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 <클로저>를 KBS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사랑과 전쟁>과 비교하는 기사를 KBS 기자 쓴 적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기사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졸업>을 연출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섬세한 심리묘사가 매력적인 영화를 그저 할리우드 배우들이 출연한 <사랑과 전쟁> 정도로 치부하는 기사라니. 판단은 자유지만, 개인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

세밀한 감정 묘사가 이끄는 영화


이 영화는 명배우들의 호연을 바탕으로 한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만든 매력적인, 일종의 ‘캐릭터 영화’다. 캐릭터들의 세밀한 감정 묘사가 영화를 이끄는 동력이다. 우선, 댄(주드 로)은 집착적이고 유약한 면모를 보이며 극의 중심에 서있다. 사진작가인 안나(줄리아 로버츠)는 매력적이지만 사랑에는 무력한 여자다.


실제 연극 <클로저>에서 댄 역을 맡았던 클라이브 오웬은 영화에서는 ‘래리’ 역을 맡았다. 그는 마초적이고 가학적인 의사로 출연해 영화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나탈리 포트만은 당돌하고 섹시한 스트리퍼 ‘앨리스’ 역으로 레옹의 '마틸다'라는 강렬했던 아역 이미지를 이 영화를 통해 벗어던졌다. 클라이브 웬과 나탈리 포트만은 이 영화로 2005년 제 6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녀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클로저>는 1997년 영국의 극작가 패트릭 마버의 동명 연극이 원작이다. 연극원작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 영화는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새로운 인물이 개입하지 않는다. 대부분, 대사를 통해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도 연극의 특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영화 <클로저>를 보고 나면 몇몇 장면의 잔상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화려한 미장센이나 극적인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인물들의 대사 때문이다.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묻고 따지다가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보이는 파괴적인 대화는 보는 사람마저도 상처받게 한다.


Hello, Stranger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다. 낯선 남자 댄에게 건네는 앨리스의 첫인사다. 영화가 끝난 뒤에 우리는 알 수 있다. 몇 년을 함께 살았어도 앨리스에게 댄은 ‘stranger’ 낯선 사람이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검정 화면 속에서 앨리스와 댄이 다시 만난다 해도 앨리스의 인사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순수하게 사랑했지만, 진실하지 않았으므로.


로맨스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보통 남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얼마나 설레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지는지 집중한다. 한 가지 예로 필자가 직전에 적었던 영화 <어바웃 타임>이 그렇다. <어바웃 타임>은 남녀 주인공이 결혼하는 순간까지 그들의 감정선을 교묘하게 따라가며 관객에게 가슴 떨리는 설렘을 안긴다.


하지만, 영화 <클로저>는 그 과정이 없다. 영화는 분절된 시간을 통해 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부각한다. 어느 날 만나서, 어느 날 헤어짐을 고하고, 어느 날 다시 찾아온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건을 묘사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고 난 뒤 일어나는 사건들의 파장을 보여준다. 내가 당신을 왜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혹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사랑이 가진 한계와 동시에 사랑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사실을 말해줘. 화내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을 하든 널 믿을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래리와 안나의 부부싸움 장면이다. 모든 믿을 테니 사실을 말해 달라던 래리. 집을 비웠던 래리는 아내인 안나의 외도를 알아채고, 지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다 안나와 댄의 섹스를 캐고들면서 폭력에 가까운 분노를 터뜨린다. 사랑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너무 솔직해서 충격적인 대사들의 향연은 사랑이 깃털 같이 간지럽히던 때가 언제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칼날 같이 온몸을 찌른다.

난 진실을 원해,
그게 없다면 우린 짐승이야


진실을 이야기했다면 사랑을 지킬 수 있었을까. 댄은 안나와 이별하고 앨리스에게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래리를 찾아가 자신이 없는 동안 앨리스와 잤는지 묻는다. 그리고 앨리스에게 찾아가 같은 질문을 한다. 안나와 바람을 핀 댄은 앨리스와 래리의 과거가 왜 중요할까.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저 궁금할 뿐이야’라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댄은 ‘나는 진실을 원해’라고 말하며 ‘그게 없다면 우린 짐승이야’라고 진실에 집착한다. 댄이 바라는 것은 진실일까 사랑일까.


앨리스는 사실대로 말하면서 이별을 고한다. 끊임없이 진실과 순수함을 강요하는 댄에게 앨리스는 스스로가 나쁜 죄를 지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진실을 듣고 나서도 댄은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앨리스는 이미 마음이 떠났다. 앨리스는 댄에게 묻는다.


사랑이 어디 있어?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댄은 왜 그토록 진실을 갈망했을까. 댄이 바란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진실로 얻게 될 자신의 심적 안정일지도. 앨리스가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 또한 진실보다는 댄으로부터 사랑을 얻으려 한 것일지도. 앨리스가 묻는 사랑이 있을 어딘가를 인간은 일생동안 찾아 헤맨다. 사랑이 예술의 주제로 마르지 않는 샘물인 것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 나서는 이유는 어딘가에 있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인가. 앨리스가 진실하지 않았던 것은 댄이 낯선 사람(stranger)이어서 그랬지만,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친밀한 타인'보다는 '사랑하는 낯선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정도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다. 그것이 적든 많든 말이다.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사랑은 쉬워질지도 모른다. 영화 중반에 댄은 앨리스에게 이별을 고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기적이야.
더 행복해지고 싶어.


물론, 쉬운 사랑이 행복을 담보하진 않는다.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0542

(사진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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