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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Jan 28. 2020

왜 여성들은 불협화음을 내는가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해석, 결말)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사진=네이버 영화
요즘은 그런 사람 없잖아요.


회사 동료가 말했다. 2014년 방영된 tvN 드라마 <미생>을 다시 봤다고 한다. 배우 강소라가 연기하는 '안영이'가 성희롱을 당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한 말이다. 극 중 마부장이라는 사람은 "파인 옷 입고 온 그 여자가 잘못이야. 만지길 했어, 들여다 보길 했어. 숙일 때마다 가리기에 뭐하러 그런 옷을 입고 왔니. 그냥 다 보이게 둬"라고 말한다. 동료는 당시에는 드라마가 사회를 제대로 비판한다고 봤는데, 이제는 너무 옛날 얘기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성희롱을 바라보는 사회적 태도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18세기에는 어땠을까. 21세기와 18세기의 성차별은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차별일지라도 어떻게 변화를 추구했느냐는 비교할 수 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프랑스혁명 직전의 18세기 독립공화국이었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역을 배경으로, 여성들에게 선택권이 없던 시대를 그린다. 귀족 여성은 결혼할 남성을 선택할 수 없고, 여성 예술가는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적을 수 없었다. 영화는 당시 사회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으며 불협화음을 내고, 스스로 삶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영화를 연출한 셀린 시아마 감독은 소녀 간의 첫사랑 이야기를 다룬 장편 데뷔작 <워터 릴리스>(2007)로 제60회 칸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후  <톰보이>(2011)로 제6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테디 심사위원상을, <걸 후드>(2014)로 제67회 칸영화제 퀴어종려상을 받았다. 이번 작품은 제72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했다. (황금종려상을 두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경합했다.)

스포일러 주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18세기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의 한 섬에서 지내고 있는 엘로이즈(아델 하에넬)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정략결혼을 위해 밀라노로 가야 한다. 당시는 사진이 없었기에 서로 초상화를 주고받았는데, 결혼이 하기 싫었던 엘로이즈는 초상화 그리기를 거부한다.

이에 엘로이즈의 어머니(발레리아 골리노)는 딸의 초상화를 몰래 그리기 위해 여성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를 고용한다. 마리안느는 딸의 산책 동무로 위장해 엘로이즈의 얼굴을 보며 몰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엘로이즈를 관찰하던 마리안느는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에 대한 마음이 커진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간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최소한의 인물과 구도, 사건만으로 동성애, 여성 간 연대, 예술과 대상의 관계 등에 대한 얘기를 풀어낸다. 여기에 화가와 모델 간 관계와 변화를 인물의 위치, 시선, 카메라 구도 등으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히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감독이 영화에 담은 것이 아니라 담지 않은 것이다. 우선 퀴어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수위 높은 정사신이 없다. <캐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등과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애정신 중 스킨십에 해당하는 것은 키스신이 전부다. 서로의 몸을 더듬는 장면조차 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이 관능적으로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대화 때문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서로의 마음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장면을 보자.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바라보고 있고,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지시대로 그녀를 계속에서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마리안느는 "당신은 당황스러울 때 입술을 깨물죠. 화가 날 때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요"라고 말한다. 이에 엘로이즈는 그녀를 가까이 오게 한 뒤 "당신은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으면 이마를 만지고, 평정심을 잃으면 눈썹이 올라가요. 당황하면 입으로 숨을 쉬죠"라고 한다. 눈빛과 짧은 대사만으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고 사랑이 커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뒤에 이어지는 키스신보다 더 관능적으로 느껴진다.


두 번째로 이 영화에는 배경음악이 없다. 배경음악은 일반적으로 관객은 듣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듣지 못하는 음악을 뜻한다. 이외에 음악은 세 번 등장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위해 하는 연주, 마지막 장면의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나오는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과 야간에 열린 축제에서 모닥불을 둘러싸고 여성들이 부르는 합창이 전부다. 멜로 영화에서는 흔히 인물들의 감정 변화가 있을 때 배경음악이 의도적으로 쓰이는데 이 영화엔 잠시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림을 그리는 연필의 소리, 모닥불 타는 소리, 바람 소리, 숨소리 등이 마치 ASMR처럼 묘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감정을 대변한다.


우린 동등해요,
아주 동등하죠


무엇보다 중요하게 담지 않는 것은 남성이다. 일단 남성 인물이 없다. 남성이 나오는 순간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가 머물고 있는 섬에 갈 때, 섬을 떠날 때 등 두 번뿐이다. 그것도 아주 잠시 스치는 정도다. 뿐만 아니라 남성의 시선이 없다. 카메라 구도를 보면 남성의 시선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정사신의 생략이 이 같은 이유다. 대체로 전문가들은 <캐롤>을 훌륭한 퀴어영화로 평가하면서도 정사신을 비판한다. 남성의 시선에서 정사를 그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정사보다는 관계 후 나른하고 평화로운 두 사람의 여유로운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게다가 정돈되어 있는 여성의 몸이 나오지 않는다. 두 여성의 제모하지 않은 몸과 늘어진 가슴, 접혀있는 살, 흐트러진 머리카락 등을 보여주며 그동안 미디어가 가공해온 이상적인 여성의 외모 상태를 깨부순다. 그때의 카메라는 고정된 상태로 동등한 눈높이에 있다. 여성의 몸을 훑어보지 않고, 두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이는 귀족인 엘로이즈가 내뱉는 "우린 동등해요"라는 대사와 일맥상통한다.


이 같은 시선은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영어 제목은 <Portrait of a Lady on Fire>다. 'Portrait of a Lady'라는 문구를 미술관에서 본 적 있을 것이다. 화가가 그린 이름 없는 여성 초상화에 붙는 경우가 많다. 제목에는 해당 문구 뒤에 'on Fire'를 붙여 남성 중심의 예술 문법을 무너뜨리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


남성을 담지 않으면서 여성의 주체성은 부각한다.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18세기 프랑스의 제도적 껍데기까지 벗겨진다. 저택에 남은 엘로이즈, 마리안느뿐만 아니라 하녀인 소피(루아나 바야미)까지 모두 동등해진다. 소피는 자수를 놓고, 마리안느는 술을 따르고 동시에 엘로이즈는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은 세 사람의 '동등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세 사람의 신분 차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귀족, 예술가, 하인으로 계급은 다르지만 자신의 세계에서 나름의 주체성을 지니고 사는 인물들이다.


지배계급임에도 여성이란 이유로 얼굴도 모르는 남성과 결혼을 해야 하는 엘로이즈는 결혼 자체를 저항하고 있다. 화가였던 아버지 뒤를 잇는 실력이 있지만 여자란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마리안느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위해 비혼을 선택한다. 하녀인 소피는 또 어떠한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라며 낙태를 선택한다. 자신이 어떻게 임신하게 되었는지, 그 남자는 누구인지 조금도 설명하지 않는다. 오로지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뒤를 돌아보지 말 것


이들의 주체성은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지하세계로 내려가 저승의 신인 하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살려달라 애원하며 리라 연주를 하는데, 감동한 하데스는 그녀를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단, "두 사람이 지상에 올라갈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내건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불안한 나머지 본인이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뒤를 돌아본다. 아직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한 에우리디케는 결국 저승으로 다시 끌려간다. 이 이야기에 대해 세 사람은 모두 다른 해석을 펼친다.


■ 소피

 "멍청한 오르페우스, 거기서 왜 돌아봐? 무슨 이유로? 말이 안 돼. 참아야지"


■ 마리안느

 "그는 사랑하는 그녀를 선택하기보다는 그녀와의 추억을 선택한 거야. 연인이 아닌 시인(예술가)으로서의 선택을 한 거야"


■ 엘로이즈

 "에우리디케가 '뒤를 돌아봐요'라고 말했을 수도 있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해석은 새롭다. 아름다웠던 순간을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이별을 선택했다는 관점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선택의 주체다.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의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돌아보라'라고 먼저 제안했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결말과 그대로 이어진다.


이와 달리 소피의 해석은 일반적이다. 에우리디케를 살리기 위해 지하세계에 갔던 오르페우스가 어리석은 행동으로 사랑에 실패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은 그동안 소피의 행동이다. 영화 초반부터 소피가 꽃을 보며 자수를 놓는 장면이 몇 차례 지나간다. 후반부에 가면 소피는 시든 꽃을 보면서 자수를 놓고 있는데, 자수 위에는 꽃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이 담겨있다. 이는 소피가 오르페우스에게 멍청하다고 했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고 예술로 승화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이 18세기 후반 프랑스라는 점은 이들의 주체성을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18세기 후반은 유럽 예술의 큰 변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당시 루이즈 비제 르 브룅이라는 여성 화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려 주목받았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성모 마리아 외엔 여성이 등장하는 초상화에는 책을 함께 그리지 않았는데, 앙투아네트 초상화를 포함해 이때부터 여성과 책이 함께 등장한다. 마지막 장면의 엘로이즈 초상화에 책이 함께 그려진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을 상징하면서 시대를 대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뒤돌아봐요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그렇게 말했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말하듯이. 이별을 선택하고 사랑했던 순간을 간직하겠다는 주체적 의지가 담긴 말이다. 마리안느는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봤다. 하데스의 '돌아보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비웃듯이. 단순하게 돌아보지 않기만 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왜 그냥 살려줄 수는 없는 것인가. 불행한 선택지만을 던져주는 사회 시스템을 비꼬듯이, 두 사람은 연인의 사랑을 이해하고 원망하지 않았던 에우리디케처럼 이별한다.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두 사람의 사랑은 일탈이자 탈선이다. 그 배경이 음악이라고 하면 음이탈이 난 것이다. 이러한 음이탈은 불협화음을 만든다. 그런데 모든 음이 이탈한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음악이 시작될 것이다. 새로운 음악엔 새로운 시선이 담기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된다.


이를 대변하는 음악이 영화에 등장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여성들이 한밤중에 모닥불을 둘러싸고 부르는 합창곡이다. 고요하던 곳에서 모닥불 타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여성들은 각자 다른 음을 내며 마치 불협화음 같은 독특한 소리를 낸다. 라틴어 가사를 반복해 부른다. 그 어떤 악기도 없다. 그 소리들은 점점 모이면서 어느새 아름다운 음악으로 변한다.

새로운 음악이 시작된 것이다. "요즘은 그런 사람 없잖아요"라는 회사 동료의 말은 불협화음을 내는 과거의 여성들 덕분에 가능했다. 이제 초상화를 보내라는 남자는 없어졌고, 여성 화가들도 그림 밑에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다. 지난해 대한민국에서는 낙태죄도 폐지됐다. 삶을 스스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음이탈이 모여 불협화음을 내면서 벌어진 일이다.


오르페우스에게 돌아보라고 말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금이다. 이런 목소리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살던 18세기 프랑스에 살고 있지 않을까. 불협화음이 난다고 해서 부당한 사회 시스템이 당장 바뀌진 않는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켜켜이 쌓일 때, 사회가 조금씩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셀린 시아마 감독은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삶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길을 택한
여성들의 용기, 사랑에
이 영화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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