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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Sep 04. 2020

인류의 마지막 아이가 살아갈 디스토피아

넷플릭스, 영화 <칠드런 오브 맨> 리뷰, 해석, 결말

코로나19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그야말로 암울한 상황에서 문화예술계에서는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들이 재조명을 받는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다시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전염병 재난을 다룬 영화 <감기>, <컨테이젼> 등이 넷플릭스 인기 순위에 진입했다. 특히 <컨테이젼>은 코로나19 사태와 유사한 상황을 예측한 영화로 화제를 모았다.

디스토피아란 무엇인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의 반대말로 역(逆) 유토피아라고도 한다. 즉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을 말한다. A.L.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 G. 오웰의 <1984년> 등에서 다뤄지는 디스토피아는 현대사회 속에 있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현대인이 무의식 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정확히 지적한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역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현대인도 이미 위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문제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출산율이 제로가 된 시대, 아이는 없다.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는 2027년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 재앙의 시대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해야할 일은 무엇인지 <칠드런 오브 맨>은 질문한다.

※스포일러 주의

서기 2027년 영국 런던, 지난 18년 4개월 동안 전 세계에서 단 한 명의 아이도 태어나지 않은 전 지구적 불임의 시대. 즉, 인류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 날,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는 20년 전 이혼한 전 부인이자 테러단체 지도자인 줄리안(줄리앤 무어)으로부터 불법 이민자를 보호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위험에 처한 불법 이민자 흑인 소녀 키(클레어 홉 애쉬티)를 안전하게 항구까지 데려가 달라는 것이다.

테오는 소녀와 동행하며 알게 된다. 이 소녀가 위험에 처한 진짜 이유를.

<칠드런 오브 맨>은 2006년 개봉 당시 완전히 망했다. 개봉 후 10년의 세월 동안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후에야 재평가되었으며, 현재는 세계적인 명작으로 꼽힌다. BBC가 뽑은 21세기 최고의 명작 13위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2016년 개봉했다. 2013년 <그래비티>가 국내에서 흥행하면서 뒤늦게 감독의 지난 작품에 대한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칠드런 오브 맨>은 인류의 디스토피아를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영화가 명작이 되기 위해서는 메시지가 아니라 훌륭한 이야기가 필수적이다. <칠드런 오브 맨>은 이야기, 등장인물, 메세지, 촬영기법, 영화에 담긴 레퍼런스 등 모두 빼어난 수작이다. 게다가 현실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역사적인 맥락에서도 훌륭하다. 영화의 배경을 2027년이라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로 설정한 것은 영화 속 문제가 현실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또한 정치, 역사, 종교, 문학 등 분야를 망라한 레퍼런스를 기반으로 현시대를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다. 일종의 SF묵시록이다. 불임, 불법 이민자, 종교 전쟁, 자살율은 현대 사회의 당면 과제가 아닌가.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다. 전 세계가 저출산으로 신음하고 있고, 특히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출산율 꼴찌다. 난민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지만, 우리의 난민 수용률은 전 세계 139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종교 전쟁은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상황에서 일부 종교인으로 인해 더 불이 붙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요?


영화는 큰 틀에서 성경을 기반으로 한다. 18년 4개월 만에 임신한 여성 '키'는 성모 마리아로 빗대어 볼 수 있다. 영화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나오지 않는다. 키의 러브스토리도 없다. 아이의 아빠는 중요하지 않다. 이는 출산 자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절망과 희망의 기준점이 될 뿐이다. 아이가 어떤 사랑하는 남성과 생긴 아이라는 정체성을 배제한 것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처럼 말이다. 마리아가 마구간에서 출산을 한 것과 테오가 키의 임신 사실을 젖소가 있는 축사에서 처음 알게 되는 것과 대비된다. 주인공 테오(Theo, θεός)는 이름부터 신(神)이다. 테오는 그리스어로 신을 뜻한다. 테오는 사실상 아이의 아버지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테오와 키는 요셉과 마리아 관계와 유사하다.

문화예술 레퍼런스도 곳곳에 숨어있다. 테오는 사촌인 미술품보호청장을 찾아가 키의 통행증을 부탁한다. 이때 사촌과 식사하는 자리 뒤편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가 걸려있다.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의 폭격으로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에 분노하여 만든 작품으로 유명한데, "나는 미래는 생각하지 않아"라며 혼돈의 시대 속 편안한 삶을 영유하는 청장의 태도와 대비된다.


다 구했는데 피에타는 못 구했네


그러면서 청장은 피에타는 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의미다. 그리스도교 예술 주제 중 하나로 14세기 독일에서 처음 다뤄지기 시작했는데, 십자가에 내려진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청장은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기득권이다. 그러한 청장도 구하지 못한 피에타는 영화 후반부에 두 차례 등장한다.

후반부 테오와 키가 총성이 빗발치는 공간을 뛰어 도망갈 때, 잠시 스치는 장면이 있다. 한 나이 든 여성이 젊은 사내를 무릎에 안고 통곡하는 모습이 지나간다. 피에타와 꼭 닮은 상태로. 이후 마지막 장면에 키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역시 또 하나의 피에타라고 할 수 있다. 돈과 권력을 모두 쥐고 있는 기득권조차 얻지 못한 피에타가 비천한 환경에서 가장 차별을 받는 흑인 난민에게서 보인다는 점은 우리 사회를 역설적으로 꼬집는다.


그 외 레퍼런스도 많다. 수시로 광고하는 자살약 이름인 'Quietus'는 셰익스피어 5대 비극인 <햄릿>에 나오는 단어다. 괴로운 삶의 종지부로서의 죽음을 뜻하는 영국의 고어로, 3막 1장에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독백에 이 단어가 나온다. 미리엄(마지 더즐리)은 위기 때마다 '옴마니 반메 홈'이라고 외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후고구려를 세운 왕인 궁예가 등장하는 드라마 <태조 왕건> 덕분에 유명해진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나타내는 불교계 진언이다. 모든 죄악이 소멸하고 공덕이 생긴다는 뜻이다. 미리엄은 모세의 누이 이름에서 가져왔다.

- 재스퍼 : 세상이 불임이 되었거든, 그래서 아무도 아기를 낳지 못했어.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 이유를 찾아나가기 시작했지. 한 리포터가 고기를 열심히 먹고 있는 남자한테 물어보았어. '혹시 왜 아무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지 아세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지.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황새 고기는 정말 맛있군.' (웃음)


재스퍼(마이클 케인)의 이 '황새 농담'에 웃었는가. 나는 못 웃었다. 재스퍼는 인류가 불임이 된 이유에 대해 황새 고기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농담을 한다. 여기서 황새는 무슨 말인가. 서양에서는 황새가 아이를 물어다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삼신할머니쯤 될 것이다. 재스퍼의 모습은 또 어떤가. 결혼 후 은둔생활을 하던 존 레넌을 꼭 닮지 않았나. 그 외에도 수많은 레퍼런스들이 영화 곳곳에 숨어있다. 이를 찾아가며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이러한 레퍼런스 뿐만 아니라 <칠드런 오브 맨>은 촬영 만으로도 영화 역사의 반열에 올라갈 작품이다. 초반부 불타는 차량이 등장하고부터 후진으로 괴한들로부터 도망가는 시퀀스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후반부에 나오는 내전 장면부터 아이의 울음소리로 전쟁이 멈추는 경이로운 순간까지의 시퀀스 역시 경이롭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간 것처럼 생생한 몰입도를 선사한다.


두 장면 모두 7분 이상 화면 커트 없이 이어진다. 그 외 모든 장면들이 현대 영화의 평균 쇼트가 4.7초인 것에 비하면 현저히 길다. 정확히는 한 번에 찍은 장면은 아니다. 정교한 촬영과 편집으로 원테이크로 찍은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원 컨티뉴어스 샷(One continuous shot)이라고도 불리는 이 촬영기법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감독 덕분이다. 그는 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그래비티>로 촬영상을 수상했다. 87회엔 <버드맨>으로, 88회엔 <레버넌트>로 3연속 촬영상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남긴 명장이다.


피가 튀어도 몰입도는 떨어지지 않는다


원 컨티뉴어스 샷과 함께 핸드헬드 카메라를 활용해 몰입도는 더 높아진다. 총포격이 난무한 상황, 인물이 뛰어가는 현장 등에서 그 흔들림이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후반부에는 카메라 렌즈에 피가 튀겨 묻은 채로 흘러가는 장면이 있다. 렌즈에 피를 닦아내고 다시 찍은 테이크도 있었지만, 감독은 "피가 튀어도 몰입도가 떨어지지 않는다"며 그 촬영본을 최종적으로 삽입했다.


이렇게 감독이 몰입도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현실감이다. 2027년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에 현재 이미 벌어진 인류의 재앙을 담아내고자 했다. 2027년의 다큐멘터리를 지금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려는 것이 감독의 의도다. 이러한 의도 하에 영화의 배경, 그 속에 담긴 수많은 레퍼런스, 촬영기법과 편집 등 이 작품은 부족한 점이 하나 없이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이 완벽에 가까운 영화가 10년 동안 손익분기점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후 재조명된 이유는 뭘까. 영화의 완성도를 넘어 우리 현실이 영화와 맞닿아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아닐까. 영화는 18년 4개월로 가장 어린 디에고가 사망했다는 뉴스로 시작하여 18년 4개월 만에 태어난 인류인 딜런의 탄생으로 끝난다. 인류의 희망인 디에고와 딜런이 모두 사회적 약자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저출산, 자살률, 실업률, 노인 빈곤율, 빈부격차, 난민 수용율, 경제 성장율 등 무엇 하나 나아질 기미가 없는 상황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칠 때 디에고의 죽음이 떠올랐다. <칠드런 오브 맨>의 결말대로라면 이제 딜런의 탄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테오의 여정을 보라. 홀로 이겨낸 고난이 하나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디스토피아에서 버티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가. 또다른 딜런의 탄생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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