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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May 14. 2017

실현되지 못한 소망은 영원히 꿈 꿀 수 있다.

영화 <화양연화 花樣年華> 리뷰(해석,결말)

가끔 미술관에 간다. 수많은 그림들이 벽에 걸려있는 그 앞을 지나다 보면 아름다움으로 내 발목을 붙잡는 작품들이 있다. 그 회화들은 마치 말을 건네는 듯,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듣고 싶게 한다. 그렇게 멍하니 서있다 보면 생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나 너무 오래돼 가물가물한 추억의 감정이 소환되어 눈물이 날 지경에 이른다.
왕가위 감독은 영화 <화양연화>를 통해 그런 낭만적인 회화들이 건네는 이야기 속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절제된 음악, 슬로 모션, 화면 안에 갇힌 공간, 강렬한 색감 그리고 장만옥과 양조위. 이러한 요소들이 영화를 마치 추상화처럼 가득 채우면서 현실의 공간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당긴다. 영화가 끝나고 붉은 화면에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가 돼서야 붙잡혔던 발목을 천천히 움직이며 미술관을 나설 수 있다.
1962년 홍콩, 지역신문사 편집 기자인 차우(양조위) 부부가 상하이 출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온다. 같은 날, 수 리첸(장만옥) 부부도 이 아파트에 이사오며, 이사 날부터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은 좁은 아파트에서 자주 부딪힌다.

배우자들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 많아 외로움을 느끼는 차우와 수 리첸은 묘한 동질감과 애틋한 감정에 휩싸인다. 이후 자신들의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차우와 수 리첸은 점점 가까워지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려 애쓴다.

왕가위 감독은 말이나 글로 표현이 불가능한 감정을 영화화하곤 하는데, 그중 <화양연화>는 영화이기에 표현 가능한 것들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영화에 등장하는 시계는 벽에 고정되어있지만 흐르는 초침을 통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뜻한다. 차우(양조위)가 연신 피워대는 담배의 연기 또한 순간에 사라지는 시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수 리첸(장만옥)의 치파오(중국 전통의상)다. (장만옥은 영화에서 약 21벌의 치파오를 선보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사랑하는 그 순간을 의미하는 <In The Mood For Love>이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의미하는 <화양연화>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화양연화’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현재를 기점으로 되돌아보는 관점이라면, ‘In the mood for love’은 그 아름다운 순간이 현재 진행형으로 느껴진다. 슬로모션으로 짧은 순간들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은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들을 얼마나 섬세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지나간 그 순간들이 빠르게 지나갔음에 대한 후회처럼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제목은 두 남녀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질 수 없는 가장 불행한 순간으로 조명한다.

우린 그들처럼 되지 않아요.
우린 그들과 달라요.


차우와 수 리첸은 자신들의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차우는 수 리첸을 호텔로 부르지만 그녀가 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1960년대라는 당시 도덕관념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호텔까지 찾아오는 과감한 행동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수 리첸은 굳이 호텔에 가서 당신의 아내와 내 남편의 외도는 우리와 다르다고 말한다. 차우는 그녀에게 '당신이 올 줄 몰랐다'라고 말하지만 이 사랑이 실현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호텔에서 두 남녀의 만남이 상징하는 것과 사랑의 표현을 억제하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그들의 헤어질 수밖에 없는 심적 고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야 결백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죠.


영화 속에서는 두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도, 키스하는 장면도 없다. 수 리첸이 '오늘은 왜 전화 안 했어요?'라고 묻자 차우는 '귀찮아할까 봐요'라고 답한다. 이에 그녀가 '그런 적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관객들은 둘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낀다. 육체적 관계가 결백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깊어지는 마음에 남녀는 불안하다. '우린 절대 잘못돼선 안돼요'라고 수 리첸은 말한다. 그녀는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이 두렵지만, 차우의 '미리 이별을 연습해봅시다'라는 제안은 슬픔과 고통에 견디기 힘들다.

결혼이 이런 건 줄 정말 몰랐어요.
혼자일 땐 뭐든 마음대로 했는데
이젠 맞춰 살아야 해요.


영화 <화양연화>는 현대 결혼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불안하고 불완전한 것인지 지적한다. 흔들리지 않고 안정된 화면 속에 불안한 두 남녀의 대화와 눈빛이 이를 대변한다. 남자의 우산 하나조차도 빌려 쓰지 않으며 정조를 지키려는 여자는 그 남자와의 이별연습에 눈물을 터뜨린다. 고대 유적 앙코르와트를 찾은 남자는 태고의 벽 속 구멍에 자신의 사랑을 봉인한다. 둘의 사랑은 이별하므로 완성되어 가장 아름다웠던 <화양연화>로 지나간 순간을 영원히 기약했다. 실현되지 못한 소망은 영원히 꿈꿀 수 있으므로.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위 자막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사진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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