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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Apr 08. 2020

삶은 항상 노을 지는 중이다.

영화 <버닝> 리뷰(결말, 해석)

생의 근본적 기분은 불안이다.


불안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학생들은 학생대로, 직장인들은 직장인대로, 자영업자들은 자영업자대로 각자의 불안을 토로한다. 삶의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아마도 삶에 정답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가령 특정인을 롤모델 삼아 그의 삶이 정답이라 믿고 추종하거나 가까운 어른들의 인생조언을 따르는 것 말이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불안에 대해 위와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언제나 불안하다. 자신이 믿는 삶의 정답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이 불안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답대로 사는 사람들마저도 그 삶의 틀을 유지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한다.

영화 <버닝>은 불안에 대한 영화다. 불안한 존재들을 반복해 보여주면서 근본적인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버닝>에는 질문만 있고 정답은 없다. 메타포와 생략을 통해 모호한 위치에 관객들을 위치시키고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남겼다. 그리고는 정말 정답이란 것이 있는지 끊임없이 묻는 영화다.

메타포(metaphor, 은유) :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


스포일 주의 

종수(유아인)는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다 군대에 다녀왔다. 복학 준비 중이며 유통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우연히 행사 도우미로 일하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고향 친구인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종수와 하룻밤을 보낸 뒤 해미는 고양이를 부탁한 채 돌연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얼마 뒤 젊고 부유하지만 무엇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의심스러운 벤(스티븐 연)이라는 남자와 함께 귀국한다.

영화 <버닝>은 <초록물고기>(1997),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 등을 만든 이창동 감독의 6번째 장편영화다. 감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해 각본을 완성했다. 영화의 모티브는 하루키의 소설이지만, 영화에는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헛간 방화>도 첨가되었다. 영화 속에서 몇 차례 포크너가 언급되는 이유다. 포크너의 <헛간 방화>는 가난한 백인이 부유한 백인에게 대항하는 이야기다. 하루키의 소설은 음산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이창동 감독은 두 개의 소설에 미스터리를 주입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감독의 새로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타포다. 영화 <버닝>은 메타포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예술이라는 건 일종의 메타포를 통해 세상과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도구"라며 메타포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메타포를 통한 스토리텔링은 친절하지 않아서 관객들을 불편하게 한다. 예를 들면 해미의 고양이가 존재하는지, 과거 해미의 집에는 우물이 있었는지, 벤은 비닐하우스를 정말 태우는 것인지 등등 불확실한 것들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위의 단어 중 그 어떤 것도 해명되지 않는다. 결론은 없다. 이 영화는 결론보다는 질문의 과정이 중요하다.

없다는 것을 잊으면 돼.


이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종수와 해미의 첫 술자리부터 살펴봐야 한다. 종수는 초등학교 동창인 해미를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해미는 귤을 먹는 팬터마임을 한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으면 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진짜 침이 나오고 그럼 맛있어" 이 대사는 해미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영화의 주제의식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던져진 화두는 그 뒤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며 반복된다.


없다는 것을 잊으면 된다는 것. 이 모호한 말은 귤이라는 메타포에서 다른 존재로 전이된다. 귤의 존재는 해미의 고양이 '보일이'라는 존재와 이어진다. 해미는 자신의 여행기간 동안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종수가 해미의 집에 갔을 때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종수는 "혹시 보일이도 상상 속에만 있는 거 아냐?"라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상상 속 고양이한테 먹이를 줘야 하는 거냐고 묻는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거야.


이에 해미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거야. 어떤 것은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게 너무 좋은 것 같아. 지금 네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이라고 답한다. 이후 종수는 본 적 없는 고양이의 밥을 주러 몇 차례 해미의 집에 온다. 줄어든 먹이, 배설물 등 고양이가 있다는 증거는 있지만 종수는 고양이를 끝까지 보지 못한다. 나중에 나오지만 집주인 아주머니는 고양이가 원래 없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메타포는 우물이다. 영화 중반부, 해미는 벤과 함께 종수의 집에 찾아온다. 해미는 "어릴 때 우물에 빠졌었는데 기억나?"라며 종수가 자신을 구해줬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종수는 기억이 전혀 없다. 예전 해미의 집에 찾아가지만 우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 우물을 본 사람도 없다. 가족들, 동네 이장님마저도. 이 영화가 메타포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보면 우물은 해미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다. 우물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외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정답은 아니다. 영화 중후반부에 종수 어머니가 우물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 존재는 모호한 위치에 다시 놓인다.

나는 판단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이는 비닐하우스로 이어진다. 해미와 함께 종수 집에 온 벤은 "한국에는 비닐하우스가 진짜 많아요.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라며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고백한다. 종수가 불쾌한 듯 눈총을 쏘며 "그게 쓸모없는지 형이 판단한다고요?"라고 묻자, 그는 "나는 판단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그건 비 같은 거예요. 비가 온다. 강이 넘치고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해요? 거기에 옳고 그른 것은 없어요. 자연의 도덕만 있지"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 존재 같은 거예요.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그런 균형"이라고 마치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말을 한다.


허황된 이야기를 내놓지만 종수는 모든 것을 다 갖춘 그의 말을 추종한다. 벤이 어떤 비닐하우스를 태울지 찾아다닌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비닐하우스에 불을 붙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후 해미가 사라진다. 종수는 벤을 찾아가 해미가 어딨는지 묻는 것보다 먼저 비닐하우스를 태웠냐고 묻는다. 벤은 태연하게 종수의 집 근처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웠다고 말한다. 그럴 리가 없다는 종수에게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 있어요"라고 답한다. 벤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종수는 그제야 해미를 찾는다. 벤은 자신도 해미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연기처럼 사라졌어.


귤, 고양이, 우물, 비닐하우스, 그리고 해미.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존재했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존재 여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의 모호함, 그때 인간이 느끼는 불안 등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다. 불안은 명확하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정확하게 판단할 경계선이 없는 모호한 상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안은 생의 근본적 기분"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극 중 모든 상황, 모든 등장인물에게서 불안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영화는 이 감정을 이미지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새벽 혹은 해 질 녘에 보이는 노을이다. 경계의 시간이다.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보인다고 믿는 순간들, 보인다고 믿지만 실재하지 않는 모호한 그 시간을 중요한 장면마다 활용하여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감독은 "노을은 낮과 밤의 경계, 현실과 아닌 것의 경계, 진실과 거짓의 경계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노을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


이러한 불안과 모호함의 반복과 변주는 종수의 환상 혹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본 적 없는 고양이를 있다고 상상하고, 기억도 나지 않는 우물에 빠진 해미를 구한 이야기를 직접 겪은 듯이 말하고, 주인 모를 비닐하우스를 태울 뻔하기도 한다. 해미의 집에 햇빛이 드는 것 또한 그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 집은 북향으로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다. 하루 한 번 아주 얇은 빛이 잠시 들어온다. 그 빛마저도 직접 내리쬐는 것이 아닌,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이다.


해미와 종수의 섹스신에서는 두 사람의 행위보다는 종수가 그 빛을 응시하는 장면을 꽤 길게 보여준다. 빛을 보는 행위에 대해 두 갈래의 해석이 있다. 그늘진 그들의 삶에도 짧은 햇빛이 들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보는 해석이 있는 반면 그렇게 짧은 햇빛마저도 진짜가 아니라 반사된 가짜 혹은 환상이라는 절망적 메시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없다는 것을 잊는 행위


이후 해미가 여행을 떠난 뒤 종수는 고양이를 돌봐주러 해미의 집에 몇 차례 간다. 갈 때마다 해미를 상상하며 자위행위를 한다. 자위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없는 섹스다. 해미가 말하는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은 영화 말미에 종수가 벤이 해미를 살해했을 것이라 확신한 뒤 해미의 집에서 창문을 마주 보고 소설을 쓰는 모습과 이어진다. 소설을 쓰는 행위 역시 '없다는 것을 잊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종수는 자신 앞에 던져진 수많은 메타포 덕분에 상상을 하고 소설을 쓸 수 있게 됐다.


종수가 소설을 쓰는 장면부터 결말까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결말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이유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메타포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모호한 위치에 뒀기 때문이다. 결말 해석은 크게 세 갈래다. '종수는 벤을 정말 살해했다',  '종수가 소설을 쓰는 장면 이후 이야기는 그 소설 내용이다', '해미의 존재 등 이야기 전체가 종수의 소설이다'. 이 중에 가장 합리적인 답안은 분명 있지만, 독자들의 상상력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굳이 선택하지 않겠다.


<버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어떤 존재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에서 느끼는 종수의 불안을 메타포를 통해 드러낸다. 그러면서 종수의 삶을 너머 스크린 밖의 관객들에게 '당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불안은 앞서 얘기했듯이 노을로 이미지화되어 보인다. 때문에 종수의 등 뒤 배경은 노을 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첫 노을은 그의 불안을 나타내고 있지만, 반복되는 노을은 그의 삶 자체로 보인다.


하이데거의 따르면, 불안은 우리 삶의 기본적 감정이거늘. 해가 뜨는 것이 삶의 시작이고 지는 것이 끝이라면 우리 삶은 언제나 노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종수를 연기한 배우 유아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의 연출에 대해 언급하며 "(감독님은 연출할 때) 정답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궁금증을 갖게 한다. '미지의 세계를 펼쳐 보자'라는 진취적 방식이다. 세상을 옳고 그름으로 가르는 분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모호함, 불명확성, 인물의 여백 등을 이야기하며 영화 <버닝>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오히려 옳고 그름이 없는 게
진실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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