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계속 자라는 거대한 산, 봉준호

봉준호 편

by 러브블랙홀

봉준호



그 봉우리는

어찌 된 일인지

해마다 자라난다


몇 해 되어 가보면

높아져 있고


또 몇 해 되어 가보면

더 높아져 있고


산은

결코 자랄 수 없는데


사람이란 산은

계속 자라는구나


지금,

세상의 최고봉 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봉준호 감독님에게 배우는 인생공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다른 시각이 다른 출발을 만든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이 말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명언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한 말입니다.

그는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봉준호 감독이 어렸을 때인, 1970년대는 영화를 텔레비전을 통해 '주말의 극장'이나 '명화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주를 이뤘던 것은 서부영화나 세계적인 소설을 바탕으로 해 영화로 제작된 것들이었습니다. 그중, 총잡이가 악당을 물리치는 서부영화는 아이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초등학교 시절 TV로 본 히치콕 감독의 라이벌, 앙리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공포의 보수>를 보고 영화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은 12살 나이에 자신을 감독의 길로 걷게 한 계기가 된 영화라고 합니다. <공포의 보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위험한 폭발물을 이동 완료하면 미션 수행의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는 다소 기괴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영화라고 합니다.

또한, 봉준호 감독은 엄청난 만화광이었다고 합니다. 홍대 앞 만화전문서점 단골이었고, 그의 영화 <설국열차>를 처음 만난 곳도 이곳 만화가게였다고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소년 코난> 또한 그에게 영감을 주는 만화라고 합니다. 그는 만화 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화 그리기도 좋아했습니다. 그의 재능은 연세대학교 교내신문 <연세춘추>에 그대로 펼쳐졌다고 합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생이 되어 매주 네 컷 만화와 그림만평을 실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매주 두 개의 만화를 그리느라 마감 공포에 시달리다 한 한기 만에 접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린 만화는 그의 영화제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디테일은 결국, 긴 노력의 다른 말이다

단편영화를 연출하며 경력을 쌓던 봉준호 감독은 우노필름 차승재 대표의 눈에 띄어 첫 번째 장편영화를 연출하게 됩니다. 서른 한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지원을 받아 연출한 <프란더스의 개>는 흥행 실패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집에 월급조차 줄 돈이 없었지만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의 아내는 굶기야 하겠냐며 봉준호 감독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줍니다. 봉준호의 재능을 믿은 차승재 대표도 다시 기회를 주고, 이때 연출한 영화가 <살인의 추억>입니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고, 이후 <괴물>을 통해 1,300만 명이라는 엄청난 관객을 모아 한국의 대표 감독 대열에 오르게 됩니다.

봉준호 감독이 성공한 배경에는 대학신문에 만화를 직접 그렸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답니다. 그 경험을 살려 영화 시나리오의 콘티를 직접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그린 양이 보통을 넘어 엄청났다고 합니다. 장편영화는 700~1,500개의 콘티가 사용되는데 봉준호 감독은 10,000컷이 넘게 콘티를 그린다고 합니다. 인물과 배경, 카메라 구도까지 모두 생각하고 콘티를 만들다 보니 콘티 불량이 엄청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디테일한 연출로 유명한 봉테일이란 별명도 여기서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 <마더>를 연출할 때는 아예 촬영장소에 살면서 동네의 지리를 지도로 그릴 정도로 완벽히 분석하고 촬영에 임했다고 합니다. 영화 <괴물>의 경우는 전문가들이나 보는 CG전문지를 6개월 동안 구독하며 독학했다고 합니다. 이런 세밀함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항상 생동감이 살아있다고 합니다.


칸과 아카데미에 기생충을 번식시키다

봉준호 감독은 '손에 탁 쥐어지는 단단한 돌멩이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영화 <옥자> 개봉당시 인터뷰에서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처럼 차돌처럼 단단한 작품을 들고 칸 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로 날아갑니다. 작품명은 <기생충>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생하지 못하고 붙어사는 벌레를 말하는 기생충은 제목부터 남달랐습니다. 기생하여 살 수밖에 없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풀어낸 이 영화는 판에 박힌 권선징악적 해피엔딩을 쫒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군상의 내면을 디테일하게 파고들어 사람들의 가슴 한편을 울리게 합니다. 사는 대륙이 다르고 사는 문화가 달라도 보는 것만으로 동질화를 느낄 수밖에 없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칸은 <기생충>에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아카데미도 외면할 수 없는 이 문제적 영화에 최고 권위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과 각본상, 국제극영화상 등 오스카 4관왕을 수여합니다. 미국 인터넷 매거진 기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동안 한국 영화가 상당한 영향력에도 오스카 상을 받지 못한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답합니다. “좀 흥미롭긴 하지만 크게 특별한 부분은 아닌 것 같다. 오스카 상은 국제 영화제가 아니다. 매우 지역적이지"라고 질문을 비틀어 버립니다. 오스카 같은 대형 시상식이 로컬이라는 뜻밖의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 봉준호 감독. 세계 최고봉의 자리에 오른 지금, 거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것입니다. 그의 영화와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하는 봉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별이 되는 순간

만약, 그때-


봉준호 감독님이 디테일을 포기했더라면?

감독이 못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인가 봉준호 감독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결국 그것 하나로 버티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결국 내가 찍고 싶은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한 컷의 이미지를 위해 수천수만 컷의 콘티를 그립니다. 콘티 만드는 것만 본다면 영화 한 편 만드는 것이 노동 중에서도 중노동을 넘어 상노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 겁니다. 우리도 무언가 원하는 한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수천 개의 땀방울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디테일은 결국 수많은 땀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별이 될 수 있다.

써보자, 노트에. 작은 것부터.

(우린 누구나 별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행동하지 않을 뿐. 작은 행동도 좋습니다. 지금, 적어 보세요)

keyword
이전 10화인생에 두 번 피는 꽃, 윤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