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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두 번 피는 꽃, 윤여정

윤여정 편

by 러브블랙홀

윤여정



꽃의

여정은


한 번 피고 지면

두 번 피는 법이 없는데

그녀의

여정은


봄에 피었다가

늦가을

또다시 더 활짝 피어난다

자연의 여정을

거스르는

깊고 깊은 생명력

인간의 여정은

이렇듯 아름답다






윤여정 님에게 배우는 인생공부


인간에게는 꽃을 못 피울 때가 없다



첫 번째 여정은, 청춘 때 화려하게 꽃 피우다

윤여정은 처음부터 연기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답니다. 연기 인생으로 접어든 계기는 한양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했는데 등록금이 부족했던 탓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TBC 방송국에서 진행자를 보조해 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이를 눈여겨본 진행자는 TBC 탤런트 공채시험을 권하였고 응시하자마자 합격증을 받게 됩니다. 흑백텔레비전 보급이 막 시작되던 때라 그 당시 탤런트는 떠오르는 신종 인기직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사회는 보수적인 사회였습니다. 스물두세 살이면 시집을 가는 게 통상적이었습니다. 다 큰 처녀는 집에 조신하게 있다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게 보통 여자의 인생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서울대 출신의 이순재와 이낙훈 선배가 탤런트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본 암기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윤여정은 신인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MBC로 이적한 윤여정은 곧바로 드라마 < 장희빈>에서 악녀 장희빈 역을 맡게 됩니다. 그녀의 악녀 연기는 너무도 훌륭해 드라마가 크게 히트를 치며 주연급 배우로 올라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일대전환기를 맞게 한 출연작은 1971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 였다고 합니다. 주인집 남자를 유혹하는 가정부로 출연해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신문들은 천재 여배우의 탄생을 알리며 대서특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윤여정은 이 작품을 통해 이른 나이에 대종상 신인 연기상과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거머쥐게 됩니다. 이듬해 그녀는 <충녀>에 출연하면서 바야흐로 윤여정의 전성시대를 만듭니다. 에피소드로 <화녀>에서 김기영 감독은 윤여정에게 쥐를 맨손으로 잡게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연기여도 고생을 한 윤여정은 다시는 이 감독과는 영화를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충녀의 대본을 보자마자 그 다짐은 아침 햇살에 눈 녹듯 온데간데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녀의 몸에는 자신의 편함보다 진정한 연기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최고 감독이었던 김기영은 윤여정을 평가하기를 내 말을 이해한 유일한 배우라고 했답니다.


두 번째 여정은, 결혼 후 급격히 시들어 가다

젊은 시절 큰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돌연 은퇴를 선언합니다. 27살에 두 살 많은 29살의 조영남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둘은 결혼을 발표합니다. 억눌렸던 시대상황 속에서 조영남의 자유분방함과 어디서나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에 끌렸다고 합니다. 연기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자신은 재주가 없지만 조영남은 다방면에 재주가 많아 반하게 되었다고 겸손히 말합니다. 두 사람은 결혼과 동시에 한국에서의 모든 명예와 성과를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결혼 후, 윤여정은 가정생활에만 충실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1년 만에 아들을 낳았고 그 후 한 명 더 낳아 두 명의 자녀를 갖게 됩니다.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아가는 듯 보였지만 둘의 결혼생활은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둘의 결혼은 종국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여정은, 온 세상에 만발하게 꽃 피우다

한 창 꽃다운 나이가 지난 그녀는 다시 몸을 추스르고 연기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녀의 연기 인생은 이른 봄에 한 번 활짝 피웠던 꽃이었습니다. 한 번 핀 꽃은 두 번 다시 화려하게 피지 못하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50년 원로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원로배우가 되어 주연보다는 조연이라는 옷을 자연스럽게 걸치게 됩니다. 맘씨 좋고 인심 좋은 엄마에서 억척스럽고 고집 센 할머니, 노인들에게 성을 파는 바카스 할머니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연기를 펼치게 됩니다. 그리고 2020년.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미국 독립영화 <미나리>에 출연하게 됩니다. 환경의 변화로 딸의 집에서 손주를 돌보며 함께 생활하게 된 할머니 순자역을 맡게 됩니다. 실제 정이식 감독은 자신의 할머니를 모티브로 대본이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윤여정이 기존의 할머니상을 비틀어 자유롭고 새로운 감각의 할머니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오랜 연기 인생의 여정을 통해 쌓아 온 그녀만의 독창적인 필모그래피와 삶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절묘하게 맞물려 윤여정만이 창조할 수 있는 할머니가 재창조된 것입니다. 주연은 아니지만 장면 하나하나가 영화의 방향을 이끌면서 영화적 완성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립니다. 절절하게 미나리를 심는 장면은 각자의 할머니가 떠올라 벅찬 감동을 선사했다고 관객들은 전합니다. 이 작품으로 윤여정은 국내 배우를 넘어 세계적인 연기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미나리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대상 격인 심사위원 대상과 최우수상 격인 관객상을 둘 다 수상합니다. 그녀의 연기력은 해외에서 인정받아 아시아 배우 최초로 미국배우조합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고, 한국 배우 최초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게 됩니다.






별이 되는 순간

만약, 그때-


윤여정 선생님이 지금까지 원로배우로 남지 않으셨다면?

윤여정 선생님도 여기까지 자신의 연기인생이 펼쳐질지 몰랐을 것입니다. 은퇴할 나이를 훌쩍 넘겼기에 손주 재롱도 보고 여행도 다니며 그만 쉬고 싶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윤여정 선생님은 말합니다.

“나는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목숨 걸고 한 거였어요. 요즘도 그런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배우는 목숨 걸고 안 하면 안 돼요. 훌륭한 남편 두고 천천히 놀면서 그래 이 역할은 내가 해 주지. 그러면 안 된다고요. 배우가 편하면 보는 사람은 기분 나쁜 연기가 된다고요. 한 씬 한 씬 떨림이 없는 연기는 죽어 있는 거라고요.”

이 인터뷰는 읽으면 가슴을 컥 막히게 합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순간에도 목숨 걸고 연기를 하신다는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찌릅니다. 나는 지금껏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가? 앞으로는? 윤여정 선생님이 황혼을 넘어 화려하게 꽃 필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듯, 우리도 한 번 무언가를 걸고 최선을 다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이 우리가 꽃필 타임입니다.






나도 작은 별이 되자.

써보자, 노트에. 작은 것부터.

(우린 누구나 별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행동하지 않을 뿐. 작은 행동도 좋습니다. 지금, 적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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