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_ 인간의 첫 사랑행성을 찾아서
인간이 달에 첫발을 디디고, 화성에 첫발을 디디고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우주정복의 후예들은 저마다 뜰채로 끈질기게 암흑 속에 숱하게 깔린 우주 알갱이를 퍼올렸다. 빈 알갱이들이었다. 그것들은 은하와 은하 너머로 흩날렸다. 게 중에 간간히 반짝이는 사금 덩어리가 채에 걸러졌다. 사금 덩어리는 인류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행성이었다. 우주에서 찰나의 시간이 더 흐르자 여기저기 사금 덩어리를 채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은 잠들어 있던 엘도라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들쑤셨다. 인류의 신대륙 발견 이후, 황금의 시대가 광활한 우주로 옮겨갔다. 바야흐로, 은하 대항해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재력과 권력의 돛을 단 자본들은 척척 진공의 망망대해에 경쟁적으로 함선을 띄웠다. 검은 황야를 앞다투어 질주하는 무소 떼 같았다. 맨 앞을 이끄는 무리의 우두머리는 단연 오메가(Ω) 그룹이었다. 그 뒤를 테슬라 그룹이 따랐다. 여기, 지구행성연합도 가세했다. 그리고 연합도 사금 덩어리 채취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지구행성연합이 하나의 사금덩어리, 즉 새로운 생명존속 가능행성 Y2209 ILU를 발견한 날, 인류가 지금껏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방향에서 인간의 행복을 고민하던 한 은둔의 괴짜 사랑학 박사는 지구행성연합 인간행복위원회에 서신을 띄웠다.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
존귀하신 지구행성연합 인간행복위원회 대의원 여러분!
저는 오늘 인간의 가장 감추고 싶은 속살을 꺼내보려 합니다.
그리고 이 우주에서 인간의 행복에 대해 깊이 고민하시며,
식견이 높으신 여러분들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회신이 있다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그럼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신처럼 영생하는 존재입니까?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하게 살아가기에 시간이 부족한 존재입니다.
지구문명은 지금껏 생명체가 활동할 수 있는 여러 행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성을 정복하는데 모든 힘과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왜 은하의 행성들을 정복하려 합니까?
인간의 소중한 시간을 물질적 정복에만 쏟는다면 너무 큰 시간과 자원 낭비 아닙니까?
인간은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최적화하기 위해 결혼한 인간들이 마냥 행복하게 살아갑니까?
사랑에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결혼한 인간들은 세월이 흐르면,
뜨거웠던 사랑의 서약은 상자 속 서류로만 넣어둔 채
처음 느꼈던 사랑의 감정은 점점 소멸해 갑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인간은 상대에게 작은 떨림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담장을 넘어 다른 사랑을 몰래 찾곤 합니다.
인간은 겉으론 그 행동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도덕 규율 때문에 담장을 넘을 용기가 없을 뿐,
기회가 닿는다면 들키지 않게 담장을 넘을 이들 또한 그들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에 모범을 보일 이들이 더 적극적이기까지 합니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은 스캔들로,
재력이 넘치는 경제인은 스폰서로,
신앙을 앞세운 종교지도자는 가스라이팅으로,
해마다 이 우주에 그릇된 애정행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탄생하고 수 천년 변치 않고 내려오는 인간의 전통처럼 되었습니다.
현명하신 인간행복위원회 대의원 여러분!
인간의 본성과 개개인의 도덕적 양심을 떠나 이런 일은 어디서 기인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욕구를 채우려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하는 존재는 보석이어도 시간이 흐르면 사랑의 감정은 돌덩이가 됩니다.
돌덩이에게 어떤 감정도 일지 않듯 매일 곁에 있어도
필요한 말만 고작 할 뿐, 애정어린 대화나 몸짓은 이내 사라집니다.
배우자에게 작은 떨림도 느끼지 못하는 결혼을,
서약했다는 의무감 때문에 평생 멍에처럼 지고 가야 할까요?
동반자에게 작은 울림도 받지 못하는 관계를,
부부라는 족쇄 때문에 죽는 날까지 순응하며 살아야 할까요?
인간에겐, 두 개의 심장이 있습니다.
'육체의 심장'과 보이지 않는 '감정의 심장'.
불타는 신혼이 지나면 뜨겁던 하나의 심장이 서서히 작동을 멈춥니다.
그리고 어느 날 싸늘하게 식습니다.
바로, 그날 '감정의 심장'이 사망한 것입니다.
더 이상 감정의 심장이 뛰지 않는 인간은
돈을 모으는 일, 자산을 키우는 일, 건강을 챙기는 일,
취미를 살리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랑을 살리는 일에는 몰두하지 않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느껴 보십시오.
아직도 집을 나서며 헤어진 아내 생각에 남편 생각에
가슴이 뛰고 흥분되는지. 작은 설렘이라도 있는지.
서글프게도 현 인간의 결혼제도는 인간의 '감정 심장'을 죽이는 불행한 제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자살자 또는 살인자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 심장'을 죽이는 자살자.
상대의 '감정 심장'을 죽이는 살인자.
이제, 이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 번 뛰고 죽어가는 인간의 '감정 심장'을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생명이 유한한 인간에겐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다시 살릴 방법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두근거림'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사랑의 두근거림'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차갑게 굳은 백 세 심장도 사랑에 눈이 머는 순간,
자신도 제어할 수 없게 미친 듯 팔딱팔딱 뛰는 게 인간의 심장입니다.
신은 그렇게 인간의 심장을 다른 포유류와 다르게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고착화되고 관습화 된 지구는 이 '두근거림'을 줄 수 없습니다.
지구는 인간의 사랑이라는 오묘한 감정을 낡은 제도로 옭아매려고만 하지 개선하려 하지 않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폐해가 발견되면 더 좋은 방향으로 고친 게, 지구의 역사였는데도 말이죠.
포기하지 않는 것 또한, 불굴의 인간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늘 진보하고 인류의 미래는 늘 진화해 왔습니다.
우리 시대가 가기 전,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새롭게 고민하고 설계해야 할 때입니다.
그 점에서 새로운 행성은 행성 그 자체로 우리에게 '두근거림'을 줍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
그래서 새로운 인간의 사랑제도를 만들고 정착하기에 그 보다 맞춤한 행성은 없습니다.
귀하들의 존귀한 선택이 인류의 새로운 사랑제도에 놀라운 변곡점이 되는 첫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지구가 아닌 곳이어서 그곳은, '인간의 첫 사랑행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From. 인간행복공학박사 Dr. Erich.
가능성 0.00001%도 없는 허무맹랑한 글이었다. 논리 비약도 심하고 특히, 인간의 사랑행성이라는 것은. 누가 큰 자본을 들여 힘겹게 찾아낸 행성을 그런 일에 쓴단 말인가? 이윤이 남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자본을 더 대야 하는 일에 선뜻 투자한단 말인가?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그것도 한두 푼도 아닌 천문학적인 돈을.
박사도 결코 결과를 바라고 보낸 서신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이상을 한 번 피력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 일을 어찌 알겠는가? 일이 되려면 생각지 못한 조력자가 나타나는 법이다. 에리히 박사가 그랬다. 전혀 예상도 하지 않은 곳에서 강력한 후원자가 나섰다.
놀랍게도 오메가(Ω) 그룹.
오메가 그룹이 어떤 집단인가? 우주정복에만 혈안이 되어 거기에만 자본을 쏟았지 인류의 행복 자체에는 일도 관심 없는 집단 아닌가? 그런데 왜?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건 아닌지 박사는 의뭉스러웠다. 저런 류의 호의는 쉽게 받아서는 안된다. 하나 주고 열을 뜯어가는 게 저들의 장삿속이었다. 하지만 내막을 알고 나니 내심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의 후원자가 오메가 그룹이 아니라, 오메가 최고 경영자의 젊은 귀부인이었다. 마리아 오메가. 그녀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으며 평판 또한 그에 못지않게 좋았다. 탐욕에 눈이 먼 그들과 달리, 사람들을 존중하며 낮은 이를 돕고 세상을 아끼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와 재력을 쏟았다. 그 옛날 지구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배우이자 자선 사업가 오드리 헵번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 그녀는 지구행성연합 다음으로 새로운 행성에 지분이 많은 2대 대주주였다. 훌륭한 후원자들이 그렇듯 마리아 오메가 여사 역시 박사를 돕는 일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 남편인 오메가 그룹의 주인도 모르게 승인도 받지 않고 조용히. 진정 그녀가 아니었다면 러브플래닛이라는 이 우주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행성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그녀는 지금의 러브플래닛을 보지 못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어린 사내아이 하나를 남기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그녀는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여기서 더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유일한 혈육마저 성인이 되자 우주 어디론가 사라졌다. 장차 우주에서 가장 큰 그룹이자 제국, 오메가를 승계받고 통치할 직계 장자였는데. 에리히 박사는 당시 비통에 빠졌다. 자신을 깊이 도운 만큼, 후원자의 자식은 자신이 지키고 싶었다. 박사는 후원인이 사라진 러브플래닛의 초석을 차근차근 다짐과 동시에 그의 아들을 찾기 위해 우주에 백방으로 소식통을 띄웠다. 하지만,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보통 지나간 자리마다 작은 흔적이라도 남는데 그것조차 없었다. 그녀에게 보답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핏줄, 도날드 오메가는 시신도 없이 우주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 어디에선가 돌연사한 것일까?
하여튼 그녀의 초창기 조력으로 러브플래닛이 탄생했고, 박사의 서신은 훗날 러브플래닛 사랑학의 기초인 서문이 되었다. 하지만 서신이 그대로 서문이 되지는 못했다. 서신에 쓰인 '인간'이란 단어는 '당신'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인간'이라는 3인칭보다는 '당신'이라는 2인칭이 좀 더 감정에 와닿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구행성연합 인간행복위원회에서 '인간'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해 인간 격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또한 몇 가지 문장은 위원회에 의해 통째로 삭제되었고, 일부는 수정을 당했다. 아주 극소수만이 원본이 뜻을 전달하기에 좋다고 했고, 다수는 급진적 발언을 삭제한 수정본이 간략하고 보기 좋다고 했다. 오메가의 젊은 부인도 서문의 수정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새로운 사랑행성이 탄생하는 것이 중요하지 문구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서문의 평가는 그 점을 인식하고 이 글을 읽는 이의 몫으로 남긴다. 어차피 러브플래닛에 입국하려면 이 행성의 사랑학 서문부터 정독해야 한다. 아무나 방문할 수 없는 여행 금지행성 러브플래닛 입국심사 과정 중 필수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뀐 부분을 고쳐 여기 다시 옮긴다.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당신은 신처럼 영생하는 존재입니까?
유한한 생명을 가진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하게 살아가기에 시간이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은 마냥 행복하게 살아가나요?
사랑한다면서 결혼한 당신은 시간이 흐르면,
뜨거웠던 서약은 상자 속 서류로만 남은 채 사랑의 감정은 점점 소멸해 갑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작은 떨림도 느끼지 못하는 사랑을
당신은 의무감 때문에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까요?
그렇게 어느 순간 작은 울림도 주고받지 못하는 관계를
당신은 죽는 날까지 그저 순응하며 살아야 할까요?
당신에겐 두 개의 심장이 있습니다.
'육체의 심장'과 '감정의 심장'.
그중 하나의 심장이 멈췄습니다.
지금 당신의 심장은 육체적 심장만 뛰는, 반쪽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당신에겐 다시 살릴 시간과 방법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두근거림'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사랑의 두근거림'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차갑게 굳은 심장도 사랑에 눈이 머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팔딱팔딱 뛰는 게 당신의 심장입니다.
신은 그렇게 당신의 심장을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행성은 행성 그 자체로 우리에게 '두근거림'을 줍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
기억하십시오.
지구가 아닌 곳이어서 그곳은, 당신의 '첫 사랑행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THE LOVE PLANET 사랑학 서문 _ 인간의 첫 사랑행성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