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학 1장. 사랑을 양보할 가장 좋은 시기
일체 자극에도
사랑의 미세전류가 흐르지 않는다면,
아무 떨림도 없이
일자 선을 그리는 심전도와 같다.
그럴 땐 그 사랑을 양보하라.
그대는 못 할지라도 이 행성 어딘가
그대의 그에게, 그대의 그녀에게,
심박수를 다시 뛰게 할 사랑이 있을 테니까.
그대에게도 분명.
THE LOVE PLANET 사랑학 1장 _ 사랑을 양보할 가장 좋은 시기
♥♥♥
러브플래닛력 16년, 그 해 12월의 마지막 날.
밤의 정점에 지구로부터 수 천 광년 떨어진 러브시티 중앙광장에는 시루에 들어찬 콩나물처럼 빽빽이 인파들이 들어찼다. 그들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러브플래닛 행성인 여러분, 앞으로 60초 남았습니다."
광장 중심에 심장 형태의 하트 모양으로 설치된 초대형 홀로그램 스크린에 한 남자가 등장했다. 으레 진행자라면 생겼을 법한 스마트한 얼굴이 잡혔다. 60초라는 남은 시간을 말할 때 사람들 입에서 설명할 길 없는 짧은 공기가 새어 나왔다.
"잠시 후... 우리들의 사랑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헤어지게 됩니다."
그 말에 인파를 이룬 남녀들이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우리... 이별을 서글퍼하지 맙시다." 진행자가 그들을 위로하고 나섰다.
"우리에겐... 이 이별 후... 우주 그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사랑을 찾을...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행자는 희망을 전파했다.
러브시티 주택단지에서도 같은 방송을 홀로그램 TV로 시청하고 있었다. 광장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이 각자 거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진행자는 지구의 새해맞이 행사 때처럼 카운트 다운을 독려했다.
"러브플래닛 여러분! 이제 함께 카운트 다운합시다. 우리의 이별의 시간을... 그리고 새로운 사랑의 시간을..."
어느새 스크린에 쓰인 60이라는 숫자는 10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진행자가 선창 했다.
"10..."
"10..."
"9..."
"9..."
광장과 집에 있는 사랑행성인들은 하나가 되어 카운트 다운을 세기 시작했다.
"8. 7. 6. 5. 4. 3. 2.1."
빠바빵 팟-
'0'
숫자가 영이 되자 갑자기 광장에 모인 남녀들이 서로 껴안기 시작했다.
[러브플래닛 행성인 여러분!]
[우리 모두의 이혼을 축하합니다.]
스크린에는 메시지가 떴다. 그것은 이혼 축하 메시지였다. 곧이어 그 자리에 연속적으로 질문이 던져졌다.
[지난 7년의 결혼기간, 행복하셨습니까?]
그 질문에 광장의 남녀들은 서로의 볼에 입 맞췄다.
[지난 7년의 결혼생활, 만족하십니까?]
그 질문에 광장의 남녀들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지난 7년의 결혼생활, 사랑이 뭔지 깨달으셨습니까?]
그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 광장의 남녀들은 이별의 악수를 했다. 그것도 해맑은 얼굴로.
61,488시간.
7년이란 사랑의 시간이 제로에 수렴하는 순간, 그들은 완전한 이별을 했다.
러브시티 주택가, 어느 집 거실에서 그 중계 장면을 보던 젊은 남자가 TV 전원을 껐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자신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다. 여자는 귀여운 얼굴상이 나이를 커버했고, 풍만한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쨍, 남자가 잔을 부딪히며 물었다.
"우리 이제 남남인가?"
경쾌하게 공간에 퍼지는 크리스털 소리를 들으며 여자가 화답했다.
"그렇지, 방금 이혼했으니까."
"7년 동안 수고했어, 누님... 나 같은 망나니 데리고 사느라. 자... 누님의 두 번째 이혼을 축하해!"
남자는 식탁 아래 숨겨놓은 알록달록 화사한 꽃다발을 들어 여자에게 전했다. 서프라이즈라도 하듯 작은 선물상자까지 함께.
"어머, 쑥스럽게... 언제 이런 것까지? 고마워. 죠... 나도 죠 덕분에 설레었던 지난날들이었어."
방금 이혼을 말한 여자가 적잖이 감동하는 눈빛이었다.
"근데 7년은... 좀 길긴 했어. 누님."
"죠, 애썼어... 나이 든 누나와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결혼생활 하느라."
"아냐, 지루해질 때쯤 헤어지는 거니까. 뭐"
"그래.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딱 좋아."
어른스러운 연상녀의 말투였다.
"죠도 첫 번째 이혼 축하해!"
그녀도 준비한 선물을 남자에게 건넸다.
"건배할까?" 남자가 제안하며 한 번 더 잔을 부딪혔다.
"좋아! 우리 7년의 추억과 새로운 미래를 위해."
"위하여... 이번에는 나보다 훨씬 멋진 남자 만나길 바랄게."
둘은 동시에 샴페인을 목젖으로 넘겼다.
"이 나이에 죠만 한 남자가 또 있을까? 이렇게 싱싱하고 야생적인. 아쉽긴 하지만... 이젠 나 같이 익은 여자 말고,.. 햇사과같이 풋풋하고 싱그런 여잘, 만날 수 있겠네? 꼭 그러길 바라. 죠 정도 매력이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입술에 묻은 달콤한 액체를 핥으며 여자도 덕담을 건넸다.
"고마워. 투정만 부리긴 했지만 누님한테 사랑이 뭔지 조금은 배운 것 같아. 진짜 고마워." 남자가 받아 여자를 치켜세웠다.
"그렇다니 나름 의미 있는 결혼이었네. 근데? 뭘 배웠는데?"
"음, 사랑은 비우는 것? 이 잔처럼. 누나는 항상 자신을 비워 날 그 안에 채워 줬잖아!"
"... 내가 그랬나? 아닌 것 같은데? 반대로 죠가 날 채워줬던 것 같은데? 내 욕망 내 욕구를."
여자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채운 두 번째 결혼을 흡족해했다.
"... 가끔 생각날 것 같아." 남자가 약간 아쉬운 표현을 했다.
"그 정도 감정이 남았을 때가 좋은 것 같아, 이별하기." 여자가 다시 어른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나쁜 감정 없이." 남자도 그것에 동의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키스 어때?" 여자가 이별의 스킨십을 제안했다.
"좋아." 남자는 흔쾌히 답했다.
"오, 마지막이라서 그런가 갑자기 심장이 뛰는데?"
여자는 현재 자신의 감정의 맥박수를 보기 위해 손목에 찬 러브워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정의 맥박수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런 바보, 러브워치는 방금 전 꺼졌지.'
여자는 샴페인을 한 모금 넣은 혀로 남자의 혀를 감미롭게 핥았다. 그 향이 키스를 더 달콤하게 했다. 남자도 이제 영영 남이 될 입술을 강렬하게 빨았다. 남자는 아래가 단단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보통 여자보다 높은 그녀의 가슴 봉우리에 습관적으로 손이 갔다. 그러나 브래지어 속으로 비집고 들어 가려던 손을 멈췄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여자가 아니었다.
남자는 입술을 뗀 후 스스로를 식혀며 말했다.
"이제, 우리 이러면 안 되지?"
"그래, 우리 착한 죠, 여기까지." 여자가 남자를 달랬다.
"역시 난 망나니야. 이 시점에 발동이 걸리고." 남자는 자신을 자책했다.
"호호... 건강한 거지." 남자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좋은 쪽으로 여자가 말했다.
"... 휴 됐어. 이제 잠잠해졌어." 남자는 내면의 뜨거움을 가라앉혔다.
"그러면 마지막 이혼 의식 할까?" 여자는 약간은 결연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래. 준비됐어. 누나도?"
두 남녀는 자신들 손가락을 서로 앞으로 내밀었다. 약지에는 링이 끼어져 있었다. 부부의 증표인 러브링이었다. 먼저, 남자가 여자의 손가락을 잡고 러브링을 옆으로 천천히 돌렸다. 여자도 그와 같이 했다.
Love Off.
링에 아주 작은 스펠링이 드러났다 자취를 감췄다. 러브링의 전원이 해제되었다.
그 순간, 둘의 부부 관계가 행성의 '사랑과이별' 컴퓨터에서 삭제되었다. 두 남녀의 마지막 이혼의식은 쿨한 남녀의 이별 장면이었다. 처음 뜨거웠던 그리고 차차 식어갔던 행성의 사랑들이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
그리고 여기 또 다른 남자도 이혼남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도 사랑해야 할 시간을 모두 소진했고 손에는 모든 것을 잊고자 캡슐약이 들려 있었다. 손목에 찬 러브워치의 마지막 '육체의 심장' 맥박수는 81, '감정의 심장' 맥박수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현저히 낮은 9였다. 7년의 시간이 다하자 불빛이 꺼진 방안에 유일한 불빛, 그의 러브워치도 점멸했다.
그가 손가락에 낀 러브링을 만졌다. 글로리아라고 각인된 아내의 이름이 링 불빛에 아주 작게 드러났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러브링을 돌려 전원을 해제시켰다. 무슨 이유인지 그의 마지막 이혼의식은 부부가 함께가 아닌 오롯이 혼자였다. 링의 전원이 꺼지며 글로리아라는 이름도 빛을 잃고 사라졌다.
Love Off.
그간의 사랑에 작별 인사를 고하는 아주 작은 글씨가 링에 쓰였다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그의 아내도 자신의 방에서 혼자 링을 돌려 그의 이름, 유진을 그녀의 링에서 그렇게 지웠을 것이다. 이것으로 그의 결혼은 쓸쓸하게 결말을 맺었다. 두 번째 이혼이었다. 방금 전까지 아내였던 그녀가 있는 방에선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유진의 방에는 꽃다발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글로리아! 7년 결혼생활 수고했어요’라는 메모지가 꽂혀 있었다. 감정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글귀였다. 그 밤, 꽃의 주인에게 가야 할 꽃이 주인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남자의 방에서 우두커니 서 뜬눈으로 새웠다.
이 행성에는 여섯 개의 작은 위성이 있었다. 각각의 이름은 재즈, 록, 힙합과 팝, 블루스, 클래식이었다. 지구의 음악 장르에서 따 왔다. 위성들은 절묘하게 세 개씩 쌍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 밤은 재즈, 록, 힙합 위성이 서쪽 하늘에 떠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오늘따라 록 위성이 유난히 밝았다. 아주 오래전, 지구시대 1962년. 영국에서 비틀스라는 걸출한 록밴드가 출현했다. 록은 음악에 저항정신을 담았다. 새로운 음악, 새로운 예술, 새로운 제도는 반항을 먹고 자란다. 창문 너머 들어온 록의 옅은 빛을 손전등 삼아 유진은 물컵을 찾았다. 손에 든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61,488시간을 몸의 세포가 잊도록. 그는 생각했다. 결혼생활 중 언제 감정의 심장이 뛰어 작은 바늘이 위로 큰 파동을 그렸는지. 그리고 언제 감정의 파동이 멈추었는지. 가물가물했다. 약 기운에 심장 박동이 뛰는 걸 감지했다. 방금까지 아내였던 전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처의 얼굴을 밀어내고 또 다른 여자의 얼굴이 잠든 눈동자에 찼다. 그의 감정의 심장이 급격히 뛰었다. 이제 모든 것을 잊을 차례다. 잊어야 산다.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그때 록이 하늘에서인지 땅에선지 울려 퍼졌다.
War, children
전쟁이란, 얘들아
It's just a shot aways
총성 한 발이면 시작되는 거야
I tell you love, sister
사랑이란, 자매여
It's just a kiss away
키스 한 번이면 되는 거야.
-롤링스톤즈 Gimme Shelter 중-
♡♡♡
"탐정님, 돈은 얼마든 드릴게요. 요즘 그이가 이상해요. 남편 뒤를 좀 밟아주세요.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는지. 혹시 이상한데 안 가는지. 그 모텔이나 호텔."
아내는 돈을 들고 탐정사무소에서 의뢰한다.
"있잖아, 아내가 수상해, 딴 남자 만나는 것 같아, 화장에 극히 신경 쓰고 옷도 평소와 다르게 입었다 벗었다 하고, 집에 들어올 때 향수 향도 진하고. 이거 어떡하지?"
남편은 담배를 들고 친구에게 의견을 묻는다.
"아이 더러워. 다른 여자와 섞은 몸을 나와 섞었다니? 아이들만 없었으면 헤어져도 수 백 번 헤어졌을 겁니다. 판사님!"
아내는 법정에서 남편의 불륜을 까발린다.
"아뇨, 싫습니다. 판사님! 내 앞에서 자기 내가 얼마나 당신 사랑하는지 알지? 그리곤 정작 남을 사랑한, 저런 쓰레기 인성을 가진 사람과는 더 이상 못 살겠습니다."
남편은 법정에서 아내의 인성까지 꺼낸다.
"변호사님! 제 인생이 억울하고 비참해 죽겠습니다. 정신적 보상까지 위자료로 청구해 주십시오."
아내는 정신적 충격까지 비용으로 해결하려 한다.
"제 인생에서 없앨 수 있다면 없애고 싶어요. 저런 가식 덩어리를 인간이라고 지금껏 사랑하고 믿었다니... 제 돈 한 푼도 줄 수 없게 만들어 주세요. 변호사님."
남편은 가장 소중했던 추억의 순간까지 영원 삭제하려 한다.
이것은 지구행성 아침저녁 주말 드라마의 단골메뉴.
그러나 이 행성에선 이런 드라마가 현실에서 펼쳐질 일은 없었다. 이혼으로 법의 심판정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지구처럼 유명 로펌을 써 이혼서류를 준비하고, 상대의 약점을 들춰 법의 논리를 들이대며,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이에게 귀책사유를 떠넘기고, 결국 이혼하면서 험담을 넘어 악다구니할 필요가 없었다.
이 얼마나 후진 결혼사회인가?
러브플래닛은 달랐다.
그저 러브워치에 표시된 7년의 시간이 다하고, 서로의 러브링을 돌려 링이 빛을 잃어 단순한 일반 반지로 변모하는 그 순간, 이혼이 자동 성립되었다.
남은 건, 위자료 문제?
그러나 위자료도 다툼의 소재가 전혀 되지 않는다. 각자에게 지급되는 위자료는 그들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얼마나 진심을 다해 노력했는지로 계산된다. 역설적이게도 부부관계의 행복을 위해 더 많이 애쓸수록 더 많은 위자료가 책정되었다. 러브워치를 통해 행성시스템에 쌓이는 부부의 기록들을 초능력 슈퍼 양자컴퓨터인 '사랑과이별'이 산출해 7년의 위자료가 각자의 러브워치로 입금된다. 그 돈은 새로운 인생을 위한 '러브머니'로 다시 사용된다.
이것이 이 행성을 설계한 괴짜 사랑 박사, 에리히 박사가 만든 ‘결혼의 해피엔딩’이었다.
"러브플래닛 결혼 시즌2도 이렇게 마감하는군."
에리히 박사는 러브플래닛 인간행복위원회 시큐리티 센터에서 7년의 결혼 시간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을 주시하고 있었다.
"큰 탈 없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야"
박사는 안도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시즌, 결혼만족도가 첫 시즌보다 5% 증가했습니다. 박사님! 첫 시즌의 단점들을 보완했던 것이 주요했던 것 같습니다."
슈퍼양자컴퓨터 '사랑과이별'이 분석내용을 박사에게 전달했다. 그제야 박사의 눈가 주위에 주름이 살짝 펴졌다.
"그래! 이제 또 시즌3을 준비해야겠군."
이 행성에선 오늘부터 모든 행성인이 돌싱남, 돌싱녀였다.
### 글을 읽는 독자님 죄송합니다. 다음 화가 THE LOVE PLANET 02화인데 올리는 과정에서 실수하여 THE LOVE PLANET 03화를 먼저 올렸습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고 THE LOVE PLANET 01화를 읽으신 분은 03화 아래에 있는 THE LOVE PLANET 02부터 먼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재 브런치북은 목차 수정이 불가능해서 부득이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