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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九) 물. 네온사인

불빛 아래 선술집, 노래방, 국밥집, 찻집, 콜라, 친구.

섬에 정착한 이후 3 년간 외로움과 쓸쓸함에 몸서리쳤다. 또래 친구나 형, 동생 없는 시골 생활은 고루 했다. 손만 대면할 일이 태산이라는 어머니의 타박에 뒤를 따라 밭이나 바다로 동행하기도 했지만, 청년은 눈만 뜨면 밭 갈러 나가는 소가 되기 싫었다. 아직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세대가 다른 어른들과 삼촌들이 대부분이어서 마음을 터놓고 얘길 나눌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이따금 어른들의 부름을 받고 가벼운 술자리에 동석(同席)하기도 했지만 서로 관심을 두는 바가 달라서 공감대를 쌓기 어려웠다. 기분 좋게 술잔을 나누다가 고성이 오가기도 하고 다시 화해하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한 분위기를 두고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좋을지 우물쭈물했다. 얼큰하게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가볍지 못하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섬은 변변찮은 가로등조차 많지 않았다. 전봇대 사이의 간격이 길어서 주변을 쉬이 밝히지 못하였다. 하얀 등불이 열심히 제 몸을 태워 열을 냈지만 이내 어둠에 갇혀버렸다. 빛 공해로 잠자리가 불편했던 도시를 생각하면 좋았지만 숙면에서 얻는 개운함만으론 아쉬움이 남았다. 밤이 찾아오면 모든 게 멈춰버렸다. 밥 짓는 연기가 마을을 돌다가도 여덟 시만 되면 사라졌다. 가벼운 마실길에 오르던 사람들도 자취를 감췄다.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집 마당에서는 가로등과 네온사인 불빛으로 물든 바다 너머 항구도시의 환한 밤을 볼 수 있었다. 바다가 몰고 온 바람이 거칠게 불면 빛이 흔들렸다. 저 빛은 무엇을 비추고 있을까? 섬에는 없는 것을 쏟아내며 상상했다. 왁자지껄한 고깃집에서 고기 굽는 숯 향이 나는 듯하였다. 서로 노래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노래방, 깍두기나 매운 김치를 뜨끈한 고기 한 점과 국물, 쌀밥이 섞인 숟가락에 올려놓고 크게 한 입 집어넣으며 허기를 달래는 국밥집, 갓 볶아낸 커피를 홀짝이며 감성을 돋우는 분위기 좋은 찻집, 톡 쏘는 콜라를 파는 슈퍼마켓까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상점이나 식당이 즐비할 도시의 거리. 허기진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모른다. 

     

한편 홀로 된 적적함은 사람을 그립게 했다. 육지로 유학 나가서 사귄 지인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말끝을 뭉뚱그려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 알겠다는 눈치로 대해주던 벗. 싼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나눠 피우곤 차디찬 밤공기를 덥게 들이켰다. 해가 지면 마을을 순회하여 도시로 들고나던 마을버스도 열을 식히고 다음 날을 위해 쉬어가는 섬.      


2019.11.10. 목포. 외로움을 떨치려고 찾았던 항구도시의 밤은 몹시 길었다 


가끔 육지에서 동창회나 모임이라도 할라치면 청년은 손을 번쩍 들며 참여 의사를 밝히곤 하였다. 정갈하게 목욕재계하고 여섯 시 반, 막차 버스에 오르면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내 주위에 모여 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육지에서 다시 섬으로 들어오는 밤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연륙교를 건너는 걸음은 도시에서 원치 않는 밤을 보내고 아침까지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약속을 전제했다.      


배부르게 국밥 그릇에 밥공기 두 그릇을 말아 허겁지겁 먹고 찻집에서 구수한 원두커피를 홀짝이다 예정한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는 즐거움은 쏠쏠했다. 서로 사는 공간이 다르니 궁금한 점이 많았다. 섬과 육지 사이에 다리가 놓였지만 섬은 섬이요, 육지는 육지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과거 말수가 적었던 청년은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는데 성격이 변했다며 놀라는 이가 많았다. 시골의 일상이야기는 대체로 자연과 사물, 생업에 관련된 것이어서 다소 육지의 화젯거리와는 동떨어져 있었지만 모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저마다 다른 밤이 있었을 터였다. 1박 2일을 작정한 청년은 짧은 밤을 기약한 무리를 감히 붙잡을 명분도, 용기도 없었다. 세월 모르고 노상에서 밤을 지새우던 스무 살 청춘은 아니라서. 직장으로 출근을 걱정하는, 신혼살림을 차리어 집 생각을 하는 이들을 마냥 붙잡을 수 없었다. 흩어지는 자리는 청년에게 늘 낯설었다. 헤어지면서 잠자리를 걱정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한편 불편했다. 걱정 말라며 웃음을 건넸지만 어쩐지 낯선 공간에 놓인 이방인이 된 듯한 쓸쓸함을 피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찜질방? 피시방? 여관? 경제적인 여건이 넉넉하지 못했던 청년은 모두가 떠나간 빈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지갑을 열며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세고 또 셌다. 가장 저렴한 밤을 택해야 하는 고민은 마음을 어지럽혔다. 사방이 건물로 가로막힌 교차로를 지나 연신 인터넷 지도를 살피며 해안 쪽으로 향했다. 바다 건너 섬이 보고 싶었다. 섬과 육지를 가르는 바다는 연륙교의 가로등 아래서 빛을 받아 유유히 흘렀다. 외로움을 잊으려고, 떨쳐내려고 도시를 찾았는데 여기에도 그 쓸쓸함과 냉랭함이 숨어 있었구나. 아늑하고 마음 편한 섬이 차라리 나았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몸에 마음마저 뒤숭숭해졌다. 대부분 찜질방에 의탁하여 밤을 꼴딱 새우고 첫차를 기다렸다. 졸린 몸으로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 익숙한 적적함이 얼마나 반갑던지. 수면욕을 채우고 나면 다시 '우왕좌왕'(右往左往)하고 말았지만.     


그래서 섬에서 혼자 놀기에 좋은 취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거나 홰 낙지잡이는 이렇게 시작했다. 들인 노력과 시간이 적지 않아 지금은 일상의 일부가 되어 지루함을 느낄 새 없는 섬살이를 즐기고 있다. 지역에서 이런저런 활동에 참여하다 보니 값이 저렴하면서도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찾아야 했는데 마침 목포 원도심에 친분이 두터운 어른이 게스트하우스를 냈다. 당장 돈이 없어도 청년에게 “다음엔 꼭 받을 테니까 편히 쉬어요.”라며 웃음을 주는 정 많고 속 깊은 분이다. 그래서 밀린 외상값을 한 번에 드리는 게 미안할 때면 가끔은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집에서 수확한 밭작물을 선물하기도 한다. 

     

여전히 도시의 밤은 길다. 하지만 적적함을 달랠 공간을 만들어서 재미있게 지새울 수 있게 됐다. 그곳은 바로 선창에 있는 목포수협 어판장이다. 이른 새벽에도 사람들이 모여 열정과 더운 기운을 발산하는 공간이다. 청년은 지난 10월 목포 선창에서 작은 사진전 열었다. ‘*파람: 바람으로 섬과 항구를 잇다’는 주제로 목포수협 어판장과 신안군의 어판장, 섬의 일상 풍경 사진 가운데 약 30여 점을 무대에 올렸다.      


이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지난 1월 한 달간 꼬박 이곳을 들락였다. 초상권 문제가 걸려서 평소 인물사진을 어렵게 생각했지만 멱살 잡히거나 뺨을 맞을 각오로 용기를 냈다. 수시로 찾으며 인사를 건네는 청년의 지극정성에 마음이 드셨는지 어른들은 타박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별 탈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사진전도 잘 치렀다. 시간을 보내며 안면을 익히거나 친분을 나누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외로운 밤이면 곧잘 찾는다. 여행가는 안에서 길을 찾지 못하면 밖에서 보라 했다. 그제야 비로소 잊고 있던 가치가 보일 거라고 말한다. 삶의 일부가 섬에 있더라도 어디 도망가진 않으니까 마음을 다잡을 수 없다면 바깥으로 나돌아보자. 저마다 답을 구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답은 늘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안팎에 있다.


*파람: 아버지와 어장을 나가는 바닷길에서는 때로 각각 작은 보트로 나눠 타기도 하였는데 바람에 목소리가 휩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목소리를 키우거나 거친 말투로 말을 주고받았다. '파람'은 '바람'을 뜻하는 강한 어조의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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