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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十) 물. 섬놈

청년은 한때 놈으로 살았다

지난해 연말을 맞이하여 동창회에 참석하려고 육지로 향했다. 모처럼 맞는 술자리에서 회포를 풀고 실내 야구 게임장을 찾았다. 으레 즐기는 코스였다. 편을 나누어서 지는 편이 맥주와 통닭을 사는 내기를 했다. 가상의 야구 캐릭터를 골라 이름을 짓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내 이름에 ‘섬 놈’이란 글을 쳐서 입력해버렸다. “섬 놈?” “뭐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만히 순서를 기다리다가 청년의 항의에 키득거리며 단어를 반복하던 그 녀석을 잊지 못한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따라 웃었지만 떨리는 주먹을 불끈 쥐며 금세 웃음을 꺼트렸다. 섬에 정착한 이래 주변사람에게 처음으로 섬놈이란 말을 들었다. 이렇게 모욕적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한편 한 단체의 연말 행사에 참석했다가 모욕적인 뒷말을 들은 적이 있다. 행사는 1박 2일로 다른 지방에서 치러졌다. 낯선 얼굴이 많았다. 청년과 가까운 지역을 고향으로 둔 사람도 있었다. 숙소에 술과 안주를 공수해온 그들은 술을 권했다. 급하게 행사장에 오느라고 피곤해서 일찍 쉬어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우리끼리 먹으면 무슨 재미냐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옷깃을 잡아당겼다. 평소 눈치 없다는 소릴 들었던 청년이지만 꾸역꾸역 주는 술을 먹고 싶지 않아 몇 순배 돌자 자리를 떴다. 이부자리를 펴고 드러누웠지만 낯선 공간이라서인지 쉬이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답답해서 문을 약간 열어두었는데 그 사이로 옅은 빛과 함께 충격적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섬 놈들은 뭔 고집이 센지.” “어쩔 수 없지요. 우리가 참아야지.” “옛날 조선 시대에 유배지가 죄다 섬 아니었소?” “귀양 오는 양반 뒤를 따르는 첩들이 섬 놈이랑 눈이 맞아 자식 낳고 살았으니 저놈들도 첩의 자식 아니겠소.” “하여간 피는 못 속인다니까.” 눈이 절로 떠졌다. 달라진 세상에 아직도 논리도 근거도 없는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대관절 제 입맛대로 문장을 짓는 저 사람들은 한국 사람인가?   

  

당장 뛰쳐나가서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한 번 보고 스칠 사이인데 눈 딱 감고 잊어버리자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쿵쾅대는 심장을 달랠 길 없이 그날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늦게 잤다. 부은 눈을 열어 상황을 살폈다. 과자봉지나 술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깨우지도 않고 짐 싸서 행사장에 가버린 사람들. 모두 어딜 갔는지 일행을 찾을 수 없었다. 급하게 간부에게 전화 해보니 일정이 예정보다 빨리 끝나서 집에 가고 있단다. 황당했다. 객실 바깥에서 청소하는 직원과 마주쳤다. 날랜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런 제길!’ 일방적이긴 했지만 통보하는 형태로 탈퇴를 언급했다. 더는 그 무리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지역에서 활동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초면인 사람들에게 자기소개할 시간도 늘어났는데 감히 신안군의 섬에서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출신을 속여 '목포'라고도 하고 '무안'이라고도 했다. 섬이 아니라고만 하면 괜찮겠지 싶었다. 고향을 숨겨야 하는 심정은 비참했다. 색안경을 끼고 볼까 봐서 겁이 났다. 언제쯤 떳떳하게 사실을 밝힐 수 있을까?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지난 8월 8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섬의 날’을 맞이했다. 섬과 바다가 주목받는 세상이 열렸다. 또 이 시기에 맞추어 청년이 사는 섬과 이웃하는 섬 암태도 사이에 ‘천사대교’가 완공되어 개통하였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각각 승용차나 관광버스를 타고 방문했다. 섬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딱지를 입는 듯하였다. 이제라도 인구 절벽 문제의 중심에 놓인 소수의 섬사람도 존중받기를 바란다. 청년은 섬 놈이 아닌 섬사람으로 혹은 섬 청년으로 불리길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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