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다에서 가족의 뿌리를 찾다
청년은 좀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육지로 이사 가기 전 유년 시절을 압해도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필름카메라를 다룰 줄 알았다. 섬이나 바다, 갯벌, 가족, 마을 행사 등 다양한 장르의 사진을 많이 찍어서 그 기록을 앨범에 차곡차곡 담아오셨다. 어머니 또한 성장하는 과정이 찍힌 사진을 몇 권의 앨범으로 만들어 보관하셨는데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부모님의 추억을 즐겨보곤 하였다.
사진에 그려진 익숙한 공간과 사람들을 새롭게 여긴 건 사진전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전시회에 올리는 작품들이 섬과 바다를 주제로 삼는 것이라서 작가의 성장 과정에서 비롯된 색깔을 곁들어 소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 과거를 여쭤보았는데 친가와 외가 어른 모두 바다나 섬에 연고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친할아버지는 압해도 무지개마을에서 나고 자라 일찍이 해태 양식업을 했고 목포 선창에 상점을 내어 구운 김을 중개하거나 직접 생산하고 판매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목포항만청에 소속되어 등대원으로 시작하여 등대장으로 퇴직하기까지 전남 서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을 다니며 근무하셨다고 한다. 하고 많은 시간 놔두고 왜 한 번도 여쭤보지 않았을까? 뒤늦게 어른들의 과거가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한지 깨달은 청년은 아쉬움을 느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청년의 성장 과정과 똑 닮았다. 두 분 모두 유년 시절을 섬에서 보내다가 목포로 오셨고 결혼 후 압해도에 신혼집을 마련하여 지주식 김 양식을 하셨다. 청년과 동생이 커가자 자식 교육을 위해 다시 목포로 이주를 결심했고 이젠 무럭무럭 자란 아들과 함께 다시 고향에 정착하였다. 필요에 따라서 뭍에 올랐지만 늘 섬과 바다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아버지는 과묵한 성격 탓에 물음에 곧잘 답해주시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탁탁’ 치며 얼른 앉아보라며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곤 하셨다.
외할아버지가 홍도에서 근무하실 때 여행 온 삼촌뻘 아저씨가 귀엽다며 예정보다 며칠을 더 머무르며 놀아주셨단다. 뭍으로 돌아가는 날 외할머니께 딸로 삼고 싶다는 진지한 얘기를 했다는 사연을 말씀해 주셨는데 “하마터면 내가 세상에 못 나올 뻔했잖아요.”라고 반문하니 “그렇지!” “그랬으면 지금에 아빠도 못 만났을 테고.” “그러니까 항상 감사하며 살아라.”라며 피식피식 웃으셨다.
칠발도는 비금도에 딸린 작은 섬인데 다양한 철새와 희귀 조류가 서식하거나 경유 하는 섬으로써 지리적, 환경적 가치를 인정받아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정 이후에는 등대도 무인화 과정을 거치면서 등탑과 관사를 남기고 직원은 철수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근무하셨던 수십 년 전에는 마을 주민이 없었고 등대를 관리하는 직원과 가족들만 머물렀다고 한다. 방학만 되면 형제들과 통통배를 타고 거친 바닷길을 따라 섬에 이르러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던 추억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셨다.
근무 시간 외에 외할아버지는 늘 행정선이 닿는 간이 부두 주변의 갯바위를 찾아 맛있는 괴기를 잡았는데 감성돔, 돌돔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생선을 낚았다고 한다. 생선은 회로도 먹고 말려서 찜이나 건정으로 요리하거나 지리탕으로 끓여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이야기하면서 연신 침을 꼴깍였다. 그 외에도 완도의 당사도 등대, 진도의 조도 등대 등 크고 작은 섬으로 근무지를 옮겨 다니다가 등대장으로 퇴직하기 직전에는 그나마 육지에 속한 해남군 화원반도의 목포구등대에서 근무하셨다고 한다.
지내고 보니 부모님을 비롯한 양가 어른 모두 청춘(靑春)이던 시절엔 바다를 끼고 섬에서 살며 일을 하셨다. 바다와 바다가 만나고, 섬과 섬이 만났으니 내 뿌리는 섬과 바다라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학업을 마치고 충분히 육지에 남아 일할 기회가 있었지만 부모님을 따라 고향에 정착한 건 숙명이었을까? 아니다. 결국 내 선택이었다. 압해도에서 살면서 어렵고 힘든 시간이 많았지만 결코 그 험난한 여정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아픔과 통증은 역설적이게도 경험과 성과라는 이름으로 다시 청년에게 남았다.
바다는 물때에 따라 끊임없이 물을 끌어들였다 내뱉는 자연의 섭리를 반복해왔다. 홰꾼은 낮과 밤이 바뀌는 불규칙한 일상으로 고단함을 느꼈지만 자연에 기대어 사는만큼 이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청년은 요즘 바다 환경에 관심을 두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이상기온 현상과 폭염으로 갯벌과 바다가 더워지고 이 영향 탓인지 바다생물의 개체 수가 급감했다. 봄에만 산란한다는 낙지는 수시로 알을 낳기 시작했다. 낳을 수 있을 때 종족 보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이상한 현상은 환경을 마음대로 써온 인간의 몫이다.
‘기후변화’가 ‘기후 위기’로 바뀌었다는 환경운동가들의 경고가 자주 뉴스에 등장하고 미세플라스틱을 비롯한 해양쓰레기가 조류를 따라 세계 각국으로 밀려들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청년 역시 낙지잡이를 하면서 해안에 쌓인 쓰레기나 갯벌에 묻혀 썩지 않는 폐어구를 흔히 보았다. 돈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지만 이젠 돈만이 아니다. 바다도 돌고 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배출된 쓰레기가 조류에 흐름으로 아시아에서 태평양을 건넜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내 눈에만 안 보이면 돼.’ ‘나만 건강하면 돼.’ 정말 나만 괜찮으면 되는 걸까?
취미로 삼았던 사진 촬영이나 생업을 꾸리기 위해 갯벌을 다닌 걸음을 어떻게 가치 있게 쓸 수 있을까? 홰꾼은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환경운동의 수단과 방법을 내 방식으로 달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말이다.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카메라는 바다의 아픔과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낙지를 잡으며 단련했던 두 다리는 그 바다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힘을 지녔다. 주어진 환경과 여건을 쓸 수 있는 만큼만. 그 이상을 해야 한다는 목적은 또 다른 욕심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끝으로 ‘홰꾼’이라는 주제로 글을 짓고 문장을 이어 한 편씩 묶어가면서 결국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마지막 단락에서만큼은 밝혀야겠다. 청년은 태생의 뿌리와 바탕을 바다에 두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좋은 기회를 만나 참 오랜만에 펜을 들고 글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뒷방에 방치하다시피 했던 조잡한 글을 다듬어 그간 찍어온 사진과 함께 무대에 올릴 수 있어서 기쁘다. 시간을 거슬러 자아를 알아가는 여정에 선뜻 길을 나선 청년에게, 섬과 바다를 소개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준 어부에게 홰꾼은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