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아래 성스러운 공간
물때에 맞추어 낙지잡이에 나섰다. 밤이 짙게 내려앉아 아득하다. 물때표를 보고 또 보았지만 기억은 잠시뿐이다.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쉬이 잊기 마련이다. 집 마당으로 향했다. 가만히 서서 칠흑 같은 어둠에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이따금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 신경이 쓰였지만 해안선을 건들다 말기를 반복하는, 철썩이는 짠물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청년은 서둘러 바지 장화를 입고 약간의 물과 간식을 챙겼다. 갯벌을 따라 바다에 이르도록 흘리는 땀을 생각하면 많이 챙기는 게 좋지만 작은 하나에도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건 청년이라서 부담이 크다. 그래서 생수를 가득 채우려다 반 병을 덜어 담고 빵을 챙기려다 사탕 몇 알을 호주머니에 넣는다. 곡선형으로 구부러진 마을길을 익숙하게 걸어갔다. 일곱 물 사리에 가까워질수록 해안에 미쳤던 짠물을 끌어당기는 바다의 힘은 강해진다. 언제 어떻게 갯벌이 드러날지 모를 일이다.
손에 들린 손전등과 지팡이를 꽉 쥐었다 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 바다 밑 갯벌에 낙지가 어디 있을까 궁금하지만 조바심 내기를 주저한다. 마음이 급하지만 걸음에 조급한 마음을 실어선 일을 그르치고 만다. 청년은 일찍이 혈기 넘치는 속도로 말미암아 제 풀에 지쳐 금세 집으로 되돌아오는 쓴 맛을 여러 번 보았던 터였다. 생각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처럼 청년은 동이 틀 무렵 항시 지팡이를 짚고 마을을 돌던 큰 어른을 떠올렸다. 유연하면서도 느린 걸음걸이는 한정된 체력으로 갯벌에 오래 머무는 데 큰 도움이 되곤 하였다.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평소 가지 않는 구간을 탐색하는 한편 예정한 물길을 소화할 수 있었다. 뭍에서는 나이나 신체의 퇴화 정도에 따라 노인과 청년을 구분하지만 갯벌에서는 오로지 경험과 발품 파는 시간에서 비롯된 숙련도로 대상을 판단한다.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지 못하는 어른이라도 개펄에서 펄펄 날기도 하고 일정한 보폭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잇기도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통하는 대목이다.
깊게 흙냄새를 흡수하고 이내 크게 내 쉬었다. 첫 발을 내딛고 다음 지점으로 향하려다 멈춰 서서 발을 굴렸다. 밭을 가는 황소처럼, 발동을 걸고 예열을 하는 자동차처럼 말이다. 물웅덩이에 장화를 살포시 올려두다가 이내 중력을 실어 거칠게 첨벙 댔다. 장화를 씻는 행위는 성스러운 의식의 하나였다. 청년이 자주 찾던 ‘*갯밭’에는 유난히 *‘쩍’(맛 좋은 참굴이 많은 압해도에서는 마을 엄니들이 굴을 까고 껍데기를 바다에 뿌리는 경우가 흔했는데 그것은 갯벌에 층층이 퇴적되어 묻혔다가 번갈아 교차하는 밀물과 썰물에 모습을 드러내곤 하였다)이 많았는데 거친 바다에 연마된 날카로운 성질을 가진 탓에 부드러운 고무장화가 찢기는 사고가 빈번했다. 물이 새어 양말이 젖기도 하고 이따금 생살이 베어나 피가 나기도 했지만 익숙한 공간이 선사하는 평온함과 여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구멍 난 장화를 신을 수 없어서 새로 사야 했지만 어획량이 점점 늘어나니 어구나 도구를 소중히 다루던 부모님의 타박도 줄어들었다.
부모님은 선상에서 낙지를 잡는 ‘주낙 잡이’를 해왔다. 참게를 미끼로 써서 긴 외줄에 달아 낙지가 물리기를 기다렸다 잡는 ‘주낙 어법’은 밀물과 썰물에 상관없이 할 수 있었고 물 때에 따라서 일시에 많은 낙지를 잡을 수 있었다. 가족의 안녕을 바라며 생계를 걱정하는 부모님 은 낙지를 많이 잡는 게 우선이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입장의 차이는 저마다 달랐다. 한정된 체력으로 몸을 쓰는 청년의 어법이 어획량에 있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선박이나 기계 다루는 솜씨가 좀처럼 늘지 않아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지속하였다. 수면 위에 뜬 부모님은 수면 아래 갯벌을 걷는 아들에게 가끔 불 밝은 손전등을 비추며 위치를 알렸다. 땅만 보고 다니느라 볼 시간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아들은 어둠에 가로막힌 무형(無形)의 공간을 뚫고 제 몸에 이르는 빛에 화답하듯 손을 흔들거나 해맑게 웃어 보였다. 때로는 손전등을 위, 아래로 흔들며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형상(形狀)을 그리기도 했다. 말이 필요 없는 ‘빛의 대화’에는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는 깊은 메시지가 실렸다.
다양한 펄이 혼재된 압해도의 갯벌은 다양한 자연·생태환경을 탐구하는 배움의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지질이 어떤가에 따라 낙지의 생김새가 달랐다. 모래가 많은 구역의 낙지는 발이 짧지만 두꺼웠다. 진뻘의 낙지는 발이 길고 얇았다. 서식 환경을 만드는 구성성분이 거칠고 부드러움에 따라서 차이가 발생되는 듯했다. 갯벌에 머무르며 켜켜이 쌓는 시간은 자연을 익히는 생태 체험이기도, 마을 안팎의 환경을 배우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가끔 낙지를 잡다가 우연찮게 월척을 발견하기도 하였는데 썰물에 이르도록 뛰놀다가 미처 물길을 따르지 못하고 갯벌에 갇혀버린 생선이나 갑오징어가 대부분이었다. 내로라하는 강태공이라도 잡기 어려울 큰 광어 한 마리를 잡은 기억이 난다. 활어는 선도가 중요해서 살아있는 채로 잡아오는 게 관건인데 이 녀석이 어찌나 힘이 좋고 거칠던지 만질 수조차 없었다. 미끌거리는 살갗을 매만지다 지팡이를 내리쳐서 기절시켰다. 간헐적으로 움직이던 뾰족한 이빨이 손가락을 물고 늘어질 듯하여 조심히 입에서 아가미 사이로 노끈을 들이밀어 묶고 어깨에 짊어졌다. 귀물(貴物)의 육중한 무게를 싣고 걷다 보니 발이 갯벌 깊숙이 박혔다. 고르지 못한 호흡을 좀처럼 가다듬을 수 없어 헉헉댔지만 부모님께 기쁨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구름처럼 부풀었다.
녹초가 되었지만 뭍에 이르러서도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마을길을 따라 걷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자국 소리가 뒤에 붙었다. 누가 궁금해서 구경 왔나 싶어서 몸을 돌리니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고양이들이 떼거지로 미행하고 있었다. 피식피식 웃으며 “너희들도 먹고 싶냐?” “몇 마리 잡았으면 작은놈으로다가 한 마리쯤 줄 수도 있겠지만 이 녀석은 부모님 선물이다.” “다음에 또 보자!” 뜻하지 않는 고양이 가족들의 마중에 기분이 좋았다.
선잠에 든 어머니를 깨우며 주방으로 불러들였다. 몇 마리 되지 않는 낙지에 이어 귀물을 보여주었더니 화들짝 놀라며 어디서 잡았냐고 물으셨다. 헛바람이 들어 감미료를 곁든 전설 속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살아 있으면 팔자며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는 어머니를 말렸다. 이렇게 좋은 귀물은 보약이니 그동안 고생했던 우리가 먹자고 설득했다. 요란한 대화에 잠에서 깬 아버지가 오시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사를 연발하셨다. 기념 삼아 치수와 무게를 쟀다. 저울은 7kg을, 줄자는 83cm를 가리켰다. 두 손으로 각각 머리와 꼬리를 잡아들고 아버지의 손에 들린 카메라로 시선을 집중했다.
살을 발라 냉장고에 넣어두고 머리와 뼈는 솥에 가득 담아 지리(고춧가루를 뿌리는 매운탕과 다른 탕국으로 섬에서는 고급 요리에 속한다)로 끓였다. 가족은 활어보다 선어를 좋아했는데 하루 정도 냉장 보관을 하면 숙성된 맛이 일품이었다. 집안 식구들을 초대해서 생선회에 *‘지리국’을 밥상에 올렸다. 어른들은 저마다 잘 먹었다며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웃기도 하고 어깨를 토닥이기도 했다. 바다는 늘 많은 것을 내어주지 않지만 가끔은 예정 없이 선물을 보내와 청년을 다시 갯벌로 이끌어냈다.
*갯뻘: 표준어로 갯벌이지만 남도 사투리의 거칠고 투박한 맛을 살리기 위해 강한 어조로 씀.
*갯밭: 생업을 잇는 마을 어민들의 공동 어장 혹은 공유 공간으로써 육지의 밭과 같은 의미.
*쩍: 조개나 굴 껍데기를 이르는 사투리.
*지리국: 고춧가루를 뿌리는 매운탕과는 달리 양파나 무를 넣어 끓이는 맑은 국 혹은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