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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三) 물. 늪

오감(五感)의 본능을 깨우다

2019.11.07. 압해도. 횃불 낙지잡이에 나서는 어부



갯벌을 오랫동안 걷다 보면 자아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본능이 깨어난다. 시각, 미각, 청각, 후각, 촉각으로 이루어진 오감(五感)을 느끼는 데에는 바다로 들고 나는 횟수나 걸음에 따르는 충분한 조업 시간이 따른다. 아무래도 많이 걸어 다닐수록 다양한 상황을 겪으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겠지. 횃불 낙지잡이는 한낮의 물질보다 단순하게 준비하면서도 민첩하게 움직여야 했다. 수없이 물때표를 보면서 간조와 만조 수위를 확인하고 기억하는 일은 필수였지만 늘 어려웠다. 낙지를 잡다 보면 쉬이 잊게 마련이었다. 청년이 사는 마을 앞바다의 갯벌은 지대가  평평해서 들고 나기에 더없이 좋았지만 낙지 잡는 데 정신을 쏟다가 밀물에 미처 뭍으로 오르지 못하면 고립되는 구간이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생동하는 대자연에 예견된 사고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할 수 없이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다. 오랫동안 걷다 보니 다리가 경직되어 쥐가 나기도 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갯벌에 걸음 하였다가 가래 낙지 구덩이에 빠져서 낙지가 될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가래 낙지잡이는 갯벌 속에 집을 짓고 사는 낙지를 잡으려고 가래로 갯벌을 파는 어법인데 그 깊이가 적게는 30cm에서 많게는 2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언젠가 구덩이에 빠진 적이 있다. 아랫배까지 잠기는 깊이였는데 첫 경험이라서 한참을 멀뚱 거리며 주변 풍경을 보았다. 그러다 위기에 봉착했음을 인지했다. 딛고 올라갈 단단한 지면이 필요했는데 온통 무른 펄이라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무언가가 닿지 않았다. 오리처럼 열심히 발짓만 하는 셈이었다. 살기 위해 힘을 냈지만 어찌할 수 없는 그 끝에서는 생(生)을 바라는 마음도 욕심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다행히 더 깊은 늪으로 빠지지 않았다. 문득 아버지가 강한 어조로 일러준 충고가 생각났다. “바다에서 일하다 보면 빠질 수도 있어.” “작업복으로 흔히 가슴팍까지 차는 바지 장화를 입는데 물이 차면 수면 가까이 떠오를 수 없으니 항시 가위 하나를 챙겨라.” “아니면 차분하게 벗도록 하고.” “가장 중요한 건 상황이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차분하게 마음먹어야 하는 점이야.” “급하면 실수할 확률이 높거든.” “제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은 2분이 채 되지 않아.” “아들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별안간 어둠 속에서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갯벌을 긁으며 뭍을 향해 오르는 만조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 공포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홰꾼의 하루를 충만케 했던 바다는 돌연 거대한 괴물이 되어 무겁게 돌진해왔다. 아메리카 대륙을 뒤흔드는 버펄로 떼의 무게 실린 발굽 소리처럼 무거운 소리를 실어 왔다. 무서웠다. 사방에서 고요함이 터지기 시작했다. 먼바다에 불을 밝힌 배가 몇 척 떠 있었지만 소리 내길 주저했다. 발악도 결국 내지르면 소모되고 마는 힘이었다. 소소한 기운이라도 아껴야 했다. 


열심히 걷던 좀 전의 걸음에서 배출된 땀방울이 미끄러지듯 이마에서 눈썹으로, 다시 콧등과 입술을 적셨다. 긴장이 풀렸다 드는 탓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빨리 판단하고 선택해야 했지만 올무에 걸린 동물처럼 발버둥만 칠 순 없었다. 진흙 묻은 손으로 이마에서 턱 밑으로 쓸어내리곤 호흡을 가다듬었다. 잡념을 내려놓기로 하였다. 혈액의 순환에 제동을 걸었다. 살고자 하는 노력도 욕심이라며. 그러다 미친놈처럼 연거푸 펄을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잿빛의 모래와 흙이 뒤엉긴 거친 한 움큼의 펄 말이다. 누런 이빨에도 손가락 하날 집어넣어 비벼댔다. 그리고 혀를 움직여 원초적인 자연의 맛을 보았다. ‘너와 내가 하나 되기 위해, 너의 피와 살을 바른다. 이제 받아주겠니?’ 바다에 무성(無聲)의 말을 던졌다.  



2019.11.07. 압해도. 불빛에 의지하며 자연을 걷는 밤에는 자아(自我)와 만나기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줄을 길게 달아 목에 걸어둔 손전등을 수면 위로 꺼냈다. 녀석도 펄을 뒤집어쓴 탓에 누렇게 떠 있었다. 목장갑에 수분을 짜내어 연신 얼굴을 닦아주었다. 밝지 않았지만 주변의 가까운 사물을 볼 수 있었다. 올무에 걸린 동물 신세였지만 조금씩 사방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앞에서 옆으로, 다시 옆에서 뒤로. 앗! 몇 발자국 떨어진 지점에서 옅게 삐져나온 가느다란 끈을 발견했다. 묻혀 있던 폐그물처럼 보였다. 팔을 뻗었다. 다행히 손가락에 닿았다. 최대한 몸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움켜쥐었다. 세게 당겨도 펄에서 딸려오지 않았다. 육신의 무게를 감당해주기를 기도하며 지면에 윗몸을 밀착시켰다. 청년은 높은 장벽을 넘는 것처럼 천천히 기어올랐다. 엄니의 뱃속에서 빠져나오는 아기처럼. 청년은 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갯벌이 되었다. 


차가운 잿빛으로 물들었을 육신에서는 냉기가 흘렀다. 추위를 느끼는 건 죽음을 비껴간 생존을 뜻했다. 아기는 진흙으로 목욕을 하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더니 이내 집과 가까운 뭍에 다다랐다. 바다를 뒤로하는 긴장 가득한 걸음으로 말미암아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이내 드러누워 버렸다. 검은 하늘엔 별이 총총 떠 있었다. 눈물이 났다. 단내 나던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조금씩 열었다. 오만상 찌푸리며 감긴 눈에 힘을 주다 말기를 반복하였다. 짠물을 짜내었다. 흘러넘치어 양미간을 타던 그것은 콧물에 코가 막히도록 계속되었다. 크게 부은 얼굴로 터벅터벅 집에 이르러 바다를 내려 보았다. 여전히 드는 물은 소리를 내었지만 보들보들하니 나쁘지 않았다. 


머드팩 덕분에 피부가 고와졌는지 모르겠지만 생(生)과 사(死) 사이에서 발버둥 치던 기억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자 배움으로 남는다. 갯벌을 온몸에 발랐으니 그 무게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그래서 걸음에 불편함이 따르지만 갯벌을 짚기에 가벼운 대나무 지팡이를 만들었다. 나보다 늘 한 발 앞서 나가는 지팡이는 발 앞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는 역할을 해주어 지금껏 청년이 숨 붙이며 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 실력 좋고 경험 많은 삼촌들에게 노하우를 듣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경험담에 지나지 않는다. 다소 많은 시간과 통증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체득하는 길을 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감이 발동하는 늪에서 뛰놀다 그 늪에 빠질 줄이야. 지금이니까 웃을 수 있지만. 이런 경험 탓에 어떤 일에 확신하기를 주저한다. 평소 취미로 삼는 사진 촬영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고, 육지 친구들과의 술 약속도 시간을 예정하지만 확정할 수 없는 건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습관이다. 지키도록 노력하지만 지킬 수 없는 상황도 있는 게 세상만사(世上萬事)다 . 


수없이 많은 사람 틈에 부대끼어 배우는 인생의 가르침이 자연에 늘 숨겨진 채 존재함은 청년으로 하여금 경외심을 갖게 한다. 낙지를 잘 잡는다는 둥 사진을 잘 찍는다는 둥 가끔이지만 주변 지인들이 칭찬을 건네면 가슴에 새긴 다짐을 꺼내곤 한다. ‘낙지야 많이 잡으면 수고한 값은 얻겠지만 욕심내지 않으렵니다.’ ‘사진은 잘 찍을 수 있겠지만 결과를 확신하지 못해요.’ ‘그래서 늘 연습하고 배우는 자세로 촬영에 임합니다.’ 겸손하게 답하지만 미덕도 뭣도 따지거나 바라지 않는다. 그저 어부의 목소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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