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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비누 Feb 05. 2017

사랑의 시대에 눈 뜬 사람

영화 <사랑의 시대>

사랑은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할까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영화 '사랑의 시대'

대저택을 상속받은 대학교수 에릭(율리히 톰센)은 집의 크기 만큼 어마어마한 관리비 재정 문제로 집을 팔고 싶어 한다. 그러나 유명 아나운서이자 에릭의 아내인 안나(트린 디어홈)와 15살인 딸 프레아(마샤 소피 발스트룀 한센)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안나는 이 큰 집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면 재정 문제도, 자신의 감정적 결핍도 충족될 것이라 믿는다. 에릭은 안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남녀 각각 5명, 4명의 공동체 생활이 시작된다.


9명의 공동체 생활은 사랑의 시작과 유사하다. 나의 행동에 집중하고 너의 말에 귀 기울여 식어있던 감정에 따뜻한 태양의 빛을 드리우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더 좋은 발전을 위해 의사소통을 하며, 설령 나의 희생이 필요하더라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사랑이라고 느껴진다면.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으랴. 서로의 감정은 결코 처음과 같을 수 없다. 영화 속 공동체 일원들도 마찬가지다. 소수는 다수에 의해 희생되고 기득권자가 쓸모없다고 느끼는 물건이면 남의 것이라도 불타 없어진다. 결국 에릭은 원만히 합의되던 식사시간 찬반토론 자리에서, 안나는 뉴스 생방송 자리에서 태양에 질식하듯 쓰러진다.

영화 '사랑의 시대'

에릭이 질식한 이유는 사랑 때문이리라. 공동체 생활은 애초에 사랑하는 아내 안나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그는 공동체 속에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적 결핍을 마주했고, 그 결핍으로 대학 제자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자신의 외도를 딸에게 들킨 에릭은 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나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안나는 남편 외도의 원인을 공동체 생활로 생각했던 걸까, 새로운 집으로 떠나려는 에릭과 그의 제자에게 공동체 생활을 제안한다. 그 속에서 에릭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리라. 그러나 세상에 유일한 진실은 이성을 잃은 사랑이라고 했던가. 에릭은 돌아올 수 없는, 태양빛으로 노랗게 물든(Yellow Brick Road), 길을 눈이 먼 채 건널 뿐이다. 진정한 떠남에는 미련이 없다.


안나의 질식 또한 오로지 사랑 때문이다. 그녀는 에릭과 둘만 나누던 관계에서 태양을 손가락으로 가리며 그늘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그늘을 만들으려는 본인의 감정적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시작한 공동체 생활이 안나에게 가장 커다란 결핍을 만들어냈다. 영화 중반부에서 갓난아이들을 상대로 한 비인권적인 실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몇십 명 정도의 갓난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말과 애정은 똑같이 쏟되, 한쪽 그룹 아이들에게는 접촉을 일절 금한다는 것이다. 결국 접촉을 금한 그룹의 갓난아이들은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다. 안나는 그 갓난아이들처럼 에릭의 접촉이 끊어진 후부터 점점 죽어간다. 그녀가 죽어가는 과정을 인지하는 사람은 딸 프레아뿐이다. 


영화 '사랑의 시대'

영화 막바지에 Elton John의 Goodbye Yellow Brick Road가 울려 퍼진다. 동경하는 세상으로 떠나는 순수함과 그 후에 오는 회의감을 노래한 곡이다. Elton John은 이 곡의 모티브를 오즈의 마법사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가는 엘리스는 여행의 끝에서 이렇게 느꼈을지 모른다. 동경하던 세상은 예전에 느끼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세상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결국 그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의 모든 순간이 동경의 세상이라는 것을. 엘리스는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여행길(태양빛으로 노랗게 물든)의 시작과 끝 어디쯤에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을 잃은 시대는 그 끝이 비참하다. 누군가에게 이 시대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사랑이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모든 시대는 사랑의 시대다. 당신이 눈먼 사랑을 눈 뜬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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