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아스토르 판탈레온 피아졸라’의 탄생 100주기입니다. 2013–14년 시즌 김연아 선수가 프리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아디오스 노니노>를 사용하면서 우리에게 친근해진 그 작곡가 ‘피아졸라’ 말입니다. 탱고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린 이 위대한 음악가의 탄생을 기념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꽤 많은 공연이 진행 중입니다. 저도 몇 군데 찾아가 음악을 들었습니다. 저처럼 피아졸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올해는 그야말로 최고의 한해입니다. 연주자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기념을 하고 있으니, 저 역시 한 번쯤 그의 생애를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탱고’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한쌍의 남녀가 추는 춤으로 먼저 기억되지 않으십니까? 탱고 음악(아르헨티나에서는 ‘탕고’라고 하더군요)은 주로 춤을 위해 연주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피아졸라에 이르러 춤을 위한 탱고에서 ‘듣는 탱고’로 새롭게 정의됩니다.
피아졸라는 1921년 3월 11일 아르헨티나 마르텔 플라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아르헨티나는 멀고, 경제적으로도 뛰어날 것이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만 그의 조부모가 이민을 온 1880년대에는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 중 하나였고, 1920년대에는 세계 7위의 경제 부국으로 꼽혔다고 합니다.
피아졸라의 아버지는 오토바이 가게를 운영했는데, 손님 중 ‘아스토르 볼로니니’라는 바이올리니스트와 친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그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줄 정도였습니다. 피아졸라 자신은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뭐 자식을 부모 마음대로 키울 수는 없지만 이름 정도는 멋대로 붙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자라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자식의 선택이긴 합니다만. ㅎㅎ
피아졸라의 오른쪽 다리는 선천적으로 많이 뒤틀려 있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수술 끝에 왼쪽 다리보다 2센티 정도 짧고 마른 다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피아졸라도 자신의 다리에 평생 신경을 썼습니다만 그의 아버지 역시 그랬습니다. 피아졸라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금지된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함이 있는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 앞장서서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의사들이 수영을 하지 말라고 하면 아버지는 수영하라고 명령했다. 달릴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달리라고 명령했다,”
1925년 아버지는 뉴욕에 가면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민을 결심합니다. 피아졸라가 4살 무렵입니다. 뉴욕에서 아버지는 이발사로, 어머니는 미용사로 일을 하면서 아들을 키웁니다. 수영과 야구를 가르치고 권투도 가르쳤습니다. 생각보다 권투에 재능이 있었는지, 피아졸라는 ‘왼손잡이’라는 별명도 갖게 됩니다. 나중에 뉴욕에 이민 온 이탈리아인들이 그러하듯 피아졸라도 갱단을 들락거렸는데, 그때 그의 ‘왼손 펀치’가 꽤 위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나이를 한참 먹은 후에도 주먹을 휘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음악적 능력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한 재능이 아닌가 싶습니다.
8살 때 아버지가 반도네온을 사줍니다. 아버지는 아코디언과 기타를 연주하고 탱고를 작곡할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집에는 음반도 많았고, 뉴욕에서 열리는 이탈리아 축제 때 연주자로 나서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반도네온은 1830년대 독일에서 만들어진 악기입니다. 건반 대신 오른손에 38개, 왼손에 33개의 단추가 달려 있습니다. 이 71개의 단추는 각각 악기가 열리거나 닫힌 상태에서 두 음을 냅니다. 말만 들어도 복잡하지요? 저도 반도네온 연주를 해 볼까 하는 찰나의 생각을 가졌던 적도 있지만 곧 포기했습니다. 넘사벽이랄까요.
피아졸라도 처음에는 반도네온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니까 뭐, 하는 마음으로 연습을 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1932년 1월 로리치홀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의 밤’ 행사에 ‘반도네온의 신동’으로 소개되어 연주를 한 것을 보면 ‘역시 노력보다는 재능인가’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네요.
피아졸라의 옆 집에는 벨라 윌다라는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창 밖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연주 솜씨에 매혹되어 문을 두드립니다. 이 피아니스트는 ‘반도네온의 신동’에게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고, 반도네온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피아노 곡을 편곡해 주기도 합니다. 피아졸라는 그를 ‘최초의 위대한 스승’으로 기억합니다. 피아졸라의 음악적 관심은 스승에게 배운 클래식과 뉴욕 할렘에서 언제나 울려 퍼지던 재즈, 친구들과 함께 연주한 포크음악 등으로 넓어집니다.
1937년 가족은 아르헨티나로 돌아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탱고 음악을 듣고 충격을 받은 피아졸라는 1939년 드디어 탱고의 메카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납니다. 밤새 밴드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고 아침이면 작곡, 편곡, 화성 같은 클래식의 기초를 차근차근 공부합니다. 탱고 음악에 클래식과 재즈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녹여보려고 노력합니다.
피아졸라는 담배 연기로 꽉 찬 클럽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똑같은 탱고 곡을 연주하는 대신 ‘듣는 탱고 음악’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탱고 연주자 중에는 악보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기존 곡을 새롭게 편곡하거나, 다른 음악적 요소를 접목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기존의 곡들을 편곡합니다. 불과 몇 시간이면 편곡 한 곡이 뚝딱 끝나는 수준이었다고 그의 가족들은 증언합니다.
많은 반도네온 연주자들이 앉아서 연주합니다. 악기 자체의 무게가 꽤 나가기 때문에 양다리로 지탱하면서 연주하는 것입니다. 간혹 선 채로 연주하는 뮤지션도 있습니다. 피아졸라가 그랬습니다. 그는 관습을 무시하고 한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선 자세로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다른 뮤지션보다 위에 있다고 느끼고 싶었다”
라고 피아졸라는 말하는데, 기분도 중요했겠으나 자신이 만든 음악을 지휘하는 지휘자로서 선 채로 밴드를 바라보며 연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피아졸라의 영상을 보면 한 다리를 의자에 올린 채 열정적으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55년 <옥테토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밴드를 조직합니다. 그들의 음악은 관습적인 것을 좋아하던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듭니다.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고 하니 좋은 의미이던 나쁜 의미이던 관심은 받았던 것 같습니다. ‘피아졸라의 왼손’도 이따금 활약합니다. 그의 음악이 탱고가 맞나, 아닌가 하는 논쟁이 주먹질로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밴드는 실패하고, 그는 미국으로 떠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학교 다니는 아들에게 교통비를 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일을 구하지 못해 투어를 다니는 댄스팀과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기도 합니다.
1959년 10월 푸에르토리코에서 공연 중이던 그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습니다. 하지만 투어를 계속해야 했던 피아졸라는 결국 며칠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탈리아계인 그의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노니노’라고 불렀습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잠시 자신을 혼자 있게 해달라고 말했고, 한참 후 그가 있던 방에서 아름다운 반도네온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Adio’s Nonino’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아마도 나는 천사들에게 둘러싸였던 것 같다. 나는 최고의 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못할 것 같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1960년 피아졸라는 처가의 도움으로 겨우 아르헨티나행 배표를 구합니다. 돌아와서 ‘킨테토 누에보 탕고’라는 밴드를 조직해 다시 음악을 시작합니다. ‘누에보 탱고’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여전히 그의 음악은 논란의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어떤 택시 기사들은 그가 ‘탱고를 파괴했다’며 탑승을 거부하기도 하고, 다른 택시 기사는 그의 음악에 감동했다며 요금을 받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런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도 그는 꾸준히 순회공연을 다니고, 클럽에서 연주를 계속합니다. 어느 날 아르헨티나를 방문했던 스탄 게츠 쿼텟의 멤버였던 게리 버튼은 그의 음악에 감명을 받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그의 음반을 돌리며 들어보라고 권하게 됩니다. 1965년 미국을 방문한 피아졸라는 자신의 음악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당시에는 저작권 문제 같은 것 없이 좋아하는 음반 정도는 복제해서 널리 유통시킬 수 있었으니까요.
피아졸라의 음악은 미국에서 그리고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습니다. 아마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떠나 유럽 여러 곳에 정착해 살기도 하고, 연주 여행을 다니기도 합니다. 전자음악까지 도입하는 파격을 보였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지요.
1990년 8월 피아졸라는 파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집니다. 의사들은 ‘회생 불가’ 판정을 내렸고, 가족들은 그를 아르헨티나로 옮깁니다.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다 1992년 7월 사망합니다.
피아졸라의 음악은 분명 ‘탱고’입니다. 그러나 그를 기점으로 확실히 탱고는 ‘다른 음악’으로 변모합니다. 피아졸라의 음악에 맞춰 ‘탱고 춤’을 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의 탱고는 확실히 ‘감상하는 탱고’이고, ‘귀를 기울이는 탱고’입니다. 일상에서 춤을 추기 위한 음악도 필요하겠으나, 그것과는 떨어져 감탄하고 감상할 탱고도 듣는 이들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리고 뛰어난 누군가가 있다면, 예를 들어 김연아 같은 사람이라면 그의 멋진 음악에 맞춰 더욱 아름다운 몸짓을 보여줄 수도 있겠죠.
피아졸라를 기억하며 오늘은 ‘뉴욕’ 칵테일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칵테일로 유명한 것은 ‘페르넷 블랑카’를 사용한 것들이라고 하는데, 피아졸라가 그것을 즐겨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Whisky’라는 곡을 작곡한 음악가이니까요. 그래서 오늘 선택한 칵테일은 위스키를 베이스로, 그가 어린 시절을 지냈고, 사랑하는 도시라고 말했던 ‘뉴욕’이라는 이름을 가진 칵테일입니다. 붉은빛의 이 칵테일을 마시면서 피아졸라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전 음반이라 음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는 분께는 고상지 씨가 녹음한 <El Gran Astor Piazzolla>라는 음반을 권합니다. 네, 뭐 저는 고상지 씨의 팬이기도 합니다. 하~
5. 글레나딘 시럽을 1/2 티스푼 넣어줍니다. 네, 아무래도 오늘 칵테일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이 시럽일 것 같습니다. 처음 들어 보신 분도 계실 텐데, 그냥 석류로 만든 시럽입니다. 인터넷에서 만원 대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글레나딘 시럽에 탄산수와 설탕을 타서 마셔도 맛이 괜찮으니 저를 믿고 한 병 주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