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어의 끝>
그런 엄마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이 책을 번역하는 일이라고 했다. 지현은 눈물을 닦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책을 내가 번역할 수는 없나?”
응접실로 나가 소파 위에 던져뒀던 가방을 가져왔다. 필기도구를 꺼내고 다른 메모지는 보이지 않아 붉은색 다이어리의 어느 빈 페이지를 어정쩡하게 폈다.
서랍을 열고 상자 속 책을 꺼내 냄새를 맡았다. 책을 한번 훌훌 넘겨보았다. 귀퉁이가 조금 삭은 책에서는 시간의 향기가 났다. 앞의 몇 페이지에는 종이가 꽂혀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사이 그 중 하나가 툭 떨어졌다. 엄마의 글씨체가 분명한 글이 적혀 있었다.
서방님이 집현전으로 자리를 옮기신 후 임금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전해 들었다. 천성이 총명하시다는 것, 경연에 임하여 모두가 허를 내두를 정도의 지혜로운 말씀을 하신다는 것, 밤 늦도록 일을 하셔서 신하 된 자로써 일찍 집에 오기가 어렵다는 것 등 대부분은 밝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엄마는 책 한 페이지마다 비슷한 크기의 종이에 번역을 해서 끼워 넣어가며 작업을 했던 것 같았다. 낡은 책 속 빼곡한 한자는 색이 바래 누렇게 된 종이 속에서 한글로 변해 뜻을 말하고 있었다. 지현은 푸른 색 펜을 꺼내서 책 표지 안 쪽에 ‘정해원이 옮겨 적다’ 라고 적었다. 그리고는 다이어리에 표지의 글자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聲자가 일단 까다로웠다. 그 다음부터는 비슷하게 옮길 수 있었다.
“그래봐야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네. 번역기를 돌려야 하나.”
핸드폰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릴 때 주위가 이상하게 밝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것은 스텐드 불빛 정도가 아니다. 밝다. 고개를 들자 책상 앞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밖은 환하다. 지현은 놀라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리창 너머 풍경은 낯선 것이었다. 정원이지만 낯설었다. 오렌지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길을 만들고 있었고 그 가운데로 대리석 바닥이 깔려 있었다. 군데군데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각기 다른 내용의 화면들이 지나갔다. 선글라스를 낀 채 뛰고 있는 날씬한 남자가 있는 스크린이 언뜻 눈에 담겼다. 연못이 있던 쪽으로 벤치가 보이고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그 아래로 공중에 떠 있는 자동차와 높은 빌딩 숲이 찌를 듯 서 있었다.
놀란 지현이 아래로 눈을 돌렸다. 분홍 스텐드가 놓인 갈색 책상과 의자는 그대로였다. 지현의 붉은 다이어리와 볼펜도 그 자리에 있었다. <성화몽기>책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전광판이 달린 베이지색 벽이 눈에 들어왔다. 전광판 안에서 뭔가를 소개하던 남자가 지현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걸어 나와 지현 앞에 마주섰다.
“으악.”
지현이 남자를 피해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츠르르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두 명의 남자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마 남자였을 것이다. 검은색 수트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싼 그들이 들어와 창문 앞에 서자 햇빛에 투과된 몸이 은색으로 변했다. 어깨와 가슴에 가로로 세개의 줄이 쳐진 로고가 붙어 있었다.
한 남자가 지현을 막고 다른 사람이 다이어리에 손을 댔다. 자신의 목 아래를 누르며 중얼거리자 츠르르르 하던 소리는 갑작스런 경고음으로 바뀌었다. 소리 없이 세 명의 남자가 더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이들은 누구지? 지현은 생각했다. 여긴 분명히 할아버지의 방이자 부모님의 방이었다. 지현은 그곳에서 성화몽기를 폈을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지? 지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세요?”
지현을 막고 있던 사람이 위협하듯 손을 들었다. 지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지현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수트의 남자들도 다 함께 고개를 돌렸다. 진청색 수트를 입은, 40대 초반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넥타이는 하지 않았고 머리에 희끗희끗 보이는 것은 흰 머리 라기 보다 멋을 내기 위해 일부러 심어놓은 것 같았다. 남자는 바닥에서 10센티 정도 떠 있는 바닥 위에 서 있었다. 남자가 손짓을 하자 지현 앞에서 정확히 멈춰 섰다. 남자와 지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이 커지고 입이 조금 벌어졌다. 움찔한 것도 같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흥미롭다는 듯 지현을 바라보았다.
“뭐야?”
아까와 같은 어조로 반복했지만 남자의 눈은 계속 지현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침입자입니다. 침입 경로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위험자입니다.”
책상 앞의 남자가 지현의 다이어리를 들었다. 볼펜이 툭 책상 위로 떨어졌다. 정장의 남자가 손을 뻗자 책상 앞의 남자가 다이어리를 건넸다.
“무기가 있나?”
남자가 물었다. 지현을 막고 서 있는 남자가 지현의 몸 바깥 쪽으로 크게 원을 그린 후 말했다.
“없습니다.”
정장의 남자는 다이어리를 소리나게 넘겼다. 지현은 얼굴을 찌뿌렸다. 다이어리다. 아무리 간단한 메모와 일정만 적어 놓았다고 해도 개인정보인 것이다. 지현이 뭔가 말하려고 할 때 정장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좋아, 루나 내 목소리 들리나?”
남자가 말하자 어디선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말씀하십시오.”
“집사들을 보내. 그리고 여기 이 보안 녀석들의 지난 10분의 메모리는 삭제한다.”
다섯 명의 남자는 땅에 박힌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네 물건이라면 챙겨. 나와 이야기하지.”
지현은 황급히 볼펜을 가방에 넣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누군가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회색 수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 둘이었다. 두 사람은 놀랍도록 똑같이 보였다.
두 사람이 소리 없이 지현 앞에 섰다. 정장의 남자는 이미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간 후였다. 한 사람은 지현의 앞에서, 다른 사람은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우와.”
방을 빠져나와 거실로 나오며 지현이 낮게 소리를 질렀다. 응접실이 있어야 할 곳은 거대한 홀이었다. 다섯개의 스크린이 각기 다른 영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높이를 알 수 없는 천정과 거대한 스크린이 보였다. 마치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전시물처럼 우뚝 걸린 구조물에서는 역시 각기 다른 화면을 내보내고 있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나선형으로 둘둘 말려 한참동안 이어졌다. 3층이나, 4층 정도. 하지만 집사라고 불린 사람들이 지현을 데리고 간 것은 거대한 엘리베이터였다. 15층 버튼을 누르자 소리 없이 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 한강이 또렷이 보였다.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