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식 Nov 18. 2020

어디서 예쁜 낙엽을 싣고 왔어요?

삶에서 빛나는 장면 하나

어디서 예쁜 낙엽을 싣고 왔어요?




   우리는 다행히 저녁 메뉴를 어렵지 않게 정했다. 스타벅스 2층 계단에서 내려와 바깥공기를 쐬니, 세상의 공기가 조금 가벼워진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는 발을 맞추면서, 서로를 앞서거니 뒤따르니 하면서, 때로는 오우’와 ‘아이구’, ‘촴나’ 같은 추임새를 마치 날숨 뱉듯 무의식적으로 내뱉으면서 아파트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차가 어디에 주차되어 있는지 모르던 내가 조금 어리둥절하는 사이, 룽설은 자신 있게 위쪽 놀이터로 나를 이끌고 갔다. 그곳에서 나는 놀라운 광경과 만났다. 노란색 낙엽더미가 차를 뒤덮고 있던 것. 높이 솟은 은행나무에서 샛노란 은행잎이 차의 천장과 앞유리, 그리고 뒷유리에 내려앉아있었다. 룽설 차의 모습이, 온몸을 뒤덮고 얼굴마저 메우려는 수만 마리의 벌 틈에서 간신히 미소 짓는 벌꾼처럼 보여서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운전을 해야 하니 마냥 웃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한겨울 밤새 폭설이 내린 다음 날 아침,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로 자동차 앞 유리에 얼어붙은 눈을 박박 긁어내시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 나는 아빠처럼 은행잎들을 박박 닦아내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 룽설이 말했다. “정릉, 운전하다 보면 날아갈 거예요.” 그 말에 기대어 나는 과감히 시동을 걸었다.


   아파트 정문을 나가자마자 왼쪽으로 핸들을 꺾으면 경사가 급한 도로가 나온다. 우리는 그 길을 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룽설의 말대로 낙엽들이 하나, 하나씩 유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속도가 조금 더디게 느껴졌는지, 룽설은 “정릉! 핸들을 좌우로 흔들어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룽설의 말투와 목소리가 한없이 천진난만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룽설은 나보다 어린아이의 얼굴이 된다.


   이윽고 도착한 감자탕 집. 비좁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식당이 위치한 탓에 주차하는 것이 조금은 버겁게 느껴졌다. 워낙 좁은 골목이라 혹여나 민폐를 끼칠까 봐 최대한 식당 앞 주차공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차를 앞으로 갔다가, 후진했다가를 반복하던 중에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주인아주머니가 유리창문에 바짝 붙어서 우리 차를 보고 계셨다. 이렇게 주차하면 안 되나, 싶어 가게로 들어가자마자 나도 모르게 주인아주머니의 안색을 살폈는데 나빠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아 안도했었다. 천연덕스럽게 먹을 메뉴를 주문하고 나니, 아주머니는 방금 전 나의 의문을 말끔히 해소해주셨다.


“어디서 왔길래 예쁜 낙엽을 가득 싣고 왔어요?”


   그렇게 말씀하시고 아주머니는 행복하신 듯 호호 웃으셨다. 그 웃음이 하도 연하고 부드러워,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자동차에 붙은 낙엽을 저렇게 아름답게  보시는 아주머니의 낙천이 인상적이기도 했고. 그 덕분에 나 역시 낯선 타인 앞에서 가다듬었던 긴장을 풀어버렸던 아늑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 행복한 대기에 취해 딴에는 능청스러운 농담이랍시고 아주머니께 이렇게 답했다. “저희가 사실…. 택배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 말을 못 들으셨는지 아주머니는 별 다른 대꾸 없이 부엌으로 가셨고, 옆에 있던 룽설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다른 화제의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그냥 웃고만 있을걸, 이라는 생각이 재빨리 들었다. 다만 나는 ‘저희는 행복을 전하는 택배 기사들이에요’라는 식의 시답잖은 농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나를 두고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주위의 평가가 옳다는 것이 여기에서 다시 한번 입증되고 말았다.


   조금은 민망해도, 나는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대해 어떤 경계나 불안도 없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모습으로 창문 가까이에서 동그란 눈으로 차를 보던 아주머니의 눈빛을, 그 특유의 낙천에 기대어 지금까지의 세월을 건너오셨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낯선 세상과 타인을 경계하느라 부지중에 스스로 무장했던 내 안의 단단하고 굳은 어떤 것들이 한꺼번에 모두 해체되어버린 경험을. 핸들을 좌우로 흔들어봐요! 하는 룽설의 개구진 목소리까지. 모두 오랜 시간 기억에 담을 것이다.


   무거워져서 자꾸만 물 아래로 가라앉으려는 내게, 귀여운 은행잎이 그려진 튜브를 던져주는 고마운 이들. (2020. 11. 17.)



    


이전 03화 내가 당신을 읽은 것처럼, 당신도 나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