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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y 30. 2020

5월의 학교, 종 소리

5월의 학교, 종 소리



   내가 중학생이었을 무렵, 학교에서 울린 종소리를 기억한다. 소프라노의 멜로디와 알토 음이 배음으로 구성된, 단순하리만큼 간단명료한 두 멜로디를. 그중에서 어떤 소리는 유난히 요란스럽게 울리기도 했지만 또 어떤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소리도 있었다. 때때로 단순한 종소리는 마음에 가만한 파동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순간 내가 품고있던 정서와 어울리게 느껴지지 않던 소리를 들을 때 특히 그랬다. 딱히 우울한 일을 겪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썩 좋지 않던 날에는 시끄러울 정도로 밝고 명랑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그랬고, 어떤 계기로 많은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아 기쁨을 숨기지 못하던 날에는 낮고 처연한 멜로디가 그랬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순간의 내 감정의 표면에 균열을 내고 마음으로 깊이 스몄다. 나는 그때 무언가를 느꼈는지, 감각했는지, 어떤 생각에 빠져들었는지 같은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순간 무언가가 내 안에 들어왔고, 어딘가 내가 깊어졌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을 기억한다. 그때 내가 느낀 건 깊이에 대한 감각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새하얀 종이의 서늘한 뒷면 같은. 모든 것은 단면이 아니라 양면으로 존재하며, 어떤 기쁨의 뒷면에는 이런 종류의 서늘함이 배어있다는 것을.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종소리를 다시 들은 건 6개월 만이다. 작년 12월, 이곳으로 이사온 후 처음 아침을 맞았을 때 창틀너머로 새어들어온 종소리에 나는 살짝 웃었는데, 그전에 살던 집에서도 학교 종소리를 매일 들었던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 집은 초등학교를 두른 담 바로 옆에 있었으므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쉬는 시간마다 아주 잠깐 커지는 명랑한 소란, 다시 이어지는 긴 침묵, 그날의 수업이 끝나면 다시 활기를 찾은 떠들썩함 같은 소리들이 매일 집으로 기분 좋게 건너들어왔다. 내가 집을 나서는 시간과 어린 초등학생들이 등교하던 시간이 우연히 맞는 날에는 일부로 걸음을 늦췄다. 그러면서 아이들과 초등학교 운동장을 조심스럽게 힐끔거렸다. 제 몸집만한 가방을 메고 등산하는 것처럼 힘겹게 걷는 아이, 자녀를 보내놓고도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해 아이가 간 곳을 향해 목을 길게 뻗는 엄마, 삼삼오오 모여 아주 사소한 말에도 온 세상이 다 듣도록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느릿한 걸음을 걸으며 눈으로 담아둔, 그날의 사진들. 


   온 가족의 불안과 걱정을 꾹꾹 담은 가방을 저마다 메고, 학생들이 등교한 지 이틀째되는 날. 나의 집 바로 옆에 있는 중학교에서 종소리는 적요를 뚫고 허공으로 퍼진다. 종소리는 한없이 명료하지만 더이상 소란스러움이 들리지 않는 교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날 눈에 담은 사진을 풍경처럼 겹쳐놓는다. 소리없이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학교가, 단단한 침묵을 지키는 교정에 서글퍼지려 하면서도 매 시간마다 변함없이 울리는 종소리가 이 서글픈 감정에 파동을 일으킨다. 우리는 꽤 잘 버티고 있습니다, 라는 아이들의 목소리처럼 들려서, 그렇게 간신히 그들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여서, 그런 성숙한 아이의 의연함 앞에서의 서글픔은 그야말로 미숙한 어른의 호들갑이어서,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약간의 부끄러움과 안도를, 불안과 서글픔 사이를 다 커서도 오간다. 다만 학교 안에서 나와 같은 종소리를 듣고있을, 17여년 전 중학생의 나처럼 원치 않게 깊어지고 있을 아이들이 아직은 너무 깊어지지 않기를, 기쁨의 배면이 그들의 기쁨을 너무 많이 훼손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2020.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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