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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Nov 26. 2020

종이가방에 넣은 단감처럼

종이가방에 넣은 단감처럼 




  친구가 종이가방을 건넸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단감 10여 개가 들어있었다. '웬 감?'이라 물으니, '시골에서 올라왔어'라고 그는 무심히 대답했다. '어디? 엄마가 보내셨어?'라 재차 물으니 '응'이라 친구는 대답했다. 나도 뭐라도 주고 싶어 졌지만 마땅한 게 없던 터라, 집으로 데려와 커피를 내려줬다. 내 제안에 친구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6평 남짓한 원룸 안에서 내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조금 지겨워졌는지 그는 방안을 돌아다니기도 하고(그래봤자 5걸음이면 방 전체를 다닐 수 있지만), 책장의 책을 뒤적이기도 하며, 세팅된 노트북의 위치를 트집잡기도 했다. 그중에 친구의 말 하나가 잊히지 않는다. 


"와...  어떻게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이 하나도 없냐."


   당시에는 심심함을 견디다가 결국 터져 나온 말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와 너는 이렇게 다르구나'를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조금 서글퍼졌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렇게 말한 친구가 고마웠다. 적어도 내가 어떤 책을 주로 읽으며 관심을 두는지, 유심히 봤다는 것이니까. 친구는 오랫동안 찾던 것을 드디어 발견한 사람처럼 반갑게 말했다.


"어? <구별짓기>가 있네? 나 교육학 공부할 때 많이 봤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가 내 것 중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책이다. 책장 맨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던 그의 눈동자의 분주함이, 내게는 단감처럼 달게 느껴졌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실은 이토록 다르다는 것을. 지향하는 가치관도, 성향도, 사람에 대한 태도도, 농담하는 버릇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아마 친구도 언젠가부터 느꼈을 것이다. 어릴 때, 그러니까 20대의 초입에 그와 막 친해져 일주일에 4일 이상을 그와 함께 놀았다든가, 군 복무 중 갑작스러운 휴가에 머물 곳이 없어 초조해하던 내게, 가족과 함께 살던 그가 자신의 집으로 선뜻 초대해줬다든가, 연인과의 이별로 힘들어할 때면 함께 게임패드를 붙잡고 위닝을 하며, 호날두로 4골을 내리 먹히면 내가 메시로 5골을 갚아주던, 그래서 '야, 다시 해.'라며 얼굴을 붉혔던, 그런 시절에는 그와 서먹해진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우리가 여전히 '친구'라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기적처럼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아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적을 이루는 안간힘의 구할 정도를 그 자신이 감당하고 있다는 것도.


   몇 해전, 그와 노량진의 거리를 둘이서 걸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모스부호의 신호처럼 대화가 연결되었다 중단되었다를 반복하던 중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그의 전화기에서 들렸다. '야, 이따 몇 시에 만나냐?' 알고 보니 그는 나와의 점심을 먹고, 오후에 또 다른 약속이 잡혀있던 것. 사람에 대해 성급한 오해를 자주 했던 그때의 나는, 그가 사람 관계에 갈증을 쉽게 느끼는가,라고 여긴 적이 부끄럽게도 있었다.


   그러나 정반대다. 그는 관계에 있어 늘 성실한 사람이다. 이미 전역한 지 7-8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명절 때마다 부대의 교회에서 관계 맺었던 목사님 내외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지금은 임지를 옮긴 교회의 부목사님을 찾아뵙기도 하며, 단 한 번이라도 친근하게 대화를 한 적이 있으면 그 친구를 잊지 않고 먼저 연락해서 안부를 묻는. 그래서 '야, 너는 왜 먼저 연락 안 하냐'라는 퉁명스러운 말을 종이가방에 넣은 단감처럼 건네는, 그런 성실한 친구가 관계에 쉽게 나태해지는 내게 있음이, 내게는 축복이다. 단감이 복스럽게 여물었다.  (2020.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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