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빠는 장례식장에 다녀오셨다. 친구 훈이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제 막 집에 들어와 아직 몸에서 찬 바람이 가시지 않은 채로 아빠는 거실에 있는 엄마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후이가 더 빨리 갈 것 같다. 이대로면 올해 못 넘길 것 같은데." 아빠는 덧붙이셨다. "후이가 자기 기도한 것 중에 하나만이라도 응답됐으면 교회 나갔을 거라 하더라. 그렇게 죽을똥-살똥 기도해도 생전 자기 기도는 응답된 적이 없다카고. 그래서 지는 하나님 안 믿는단다." 아빠는 친구 후이의 말에 대해 꽤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 같았다.
할머니 집으로 오는 오늘, 차 안에서 아빠는 말씀하셨다. "세상은 불공평해. 누구는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좋은 환경에서 살고, 또 누구는 죽을똥-살똥 부지런해도 버는 것도 없고." 아빠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나는 기다렸다. "가만 보면 신앙도 불공평한 것 같애. 누구는 간절히 죽을힘을 다해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고, 또 누구는 뒹굴뒹굴 퍼질러 놀면서 잠깐 기도해도 응답받고. 그래서 신앙도 불공평하다, 싶더라. 공평, 근데 사실 불공평, 공평을 따지는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공평, 불공평의 기준이 내게 없으면,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없어지지 않겠나." 나는 아빠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내 시야가 닿지 않는 왼편 운전석에서 말을 마치신 아빠는 다시 무거운 침묵으로 빠지셨다. 차를 주차해놓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아빠는 단단한 고요를 깨고 말씀하셨다. "후이가 얼마나 간절했겠노. 지 생명이 달렸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느끼는 건 내가 주체가 아니구나. 하나님이 주체구나, 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빠의 독백이 끝날 때쯤, 우리는 할머니 집에 도착했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덧붙일 기회가 없었다. 실은 아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빠의 말이 내 말을 밀어넣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머니 집을 다녀온 지금까지 아빠의 말이 유언처럼 귓가에 맴돈다. 공평, 불공평의 기준이 내가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것. 하나님과 내 생각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으므로, 내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실은 그건 내 기준이겠지, 라는 생각들이 순서 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쉽게 결론을 맺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공평이란 뭘까. 세상의 모든 불공평이 단지 피조물의 기준에 입각한 주관적인 판단이라면, 하나님의 공평은 우리 세계에 어떻게 객관적으로 적용되는 건가. 그 둘은 우리 세계에서 언제 겹쳐지는 걸까. 피조물의 공평과 절대자의 공평이 서로 다르다는 아빠의 말씀에서 나는 위안을 얻지못하고, 피조물로부터 아득히 떨어져 있는 조물주와의 낯선 거리감만을 감각했다. 오늘은 이렇게 위악적이고 싶었다. 아빠는 바람 쐬러 잠깐 어디를 다녀오겠다, 는 말씀을 남기시고 외출하셨다. 아빠가 너무 멀리까지 다녀오시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2020.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