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식 Feb 15. 2022

당신의 분더카머

당신의 분더카머



   오랜만에 집은 펜. 하얀 종이의 감촉, 되짚어보는 기억들.


  윤희경의 책 ‘분더카머’를 읽고 서양의 오랜 전통인 ‘분더카머’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분더카머란 박물관의 일종의 전신이긴 하지만 그 맥락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도 있는데 어떤 류의 기획, 뚜렷한 대상, 주제로 묶어놓은 것이 박물관이라고 한다면, 분더카머는 그것 없이 온갖 류의 사물들이 잡다하게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누군가의 분더카머를 보면 그 사람의 취향과 사고관 같은 게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것.


  윤희경 작가는 분더카머를 자신의 어느 생애의 기억과 연결시켜 이 책을 하나의 ‘분더카머’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이 같은 접근법을 빌리면 내 분더카머는 일기장이 아닐까. 여기에는 내 사유의 흔적들, 내가 갈망한 것, 질투한 것, 아픔, 수치스러운 순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의식적으로 자신을 치장하거나 꾸미지 않은 날 것이라 할 수 있는 삶의 조각들이 문자라는 언어 기호로 전시되어 있다.


  어느 책에서 봤던 문장을 떠올린다. 인간의 심연은 신도 보지 못하는 골짜기라고.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듣기라도 한다면 까무러칠 법한 말이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신이 이런 문학적 표현을 허용해준다는 점이 오히려  그의 한없는 포용과 은혜가 드러나면서 동시에 인간 심연도 그만큼 깊다는 것이 강조되는, 이렇게 함께 이기는 길을 걷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의 분더카머는 하나님도 보지 못한다,라고 적어놓고는 그만 오싹해진다. 이것은 내가 도달하고 싶은 도착지가 아니다. 다르게 하고 싶다. 하나님께만 보여드리고 싶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아직 혼돈에 머문 텍스트를 해석하셔서 질서를 만들어주시고 빛이 있음을 선언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어떤 하나의 단순한 단어, 관념, 가치로 환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내 소망을 적었으니, 이제 아빠의 삶을 적어볼까.


   어제 구미 버스터미널로 날 바래다주시면서 아빠는 말했다. 어제 잠이 하도 안 와서 그냥 계속 누워만 있었다이. 잠을 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깬 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로 누워있는데 그결에 아빠는 자신이 어느덧 중학생 2학년이 되어 있었다고. 그때 아빠는 고민했다고 했다. 내가 그 순간 너마이를 찾아가야 할지. 너마이를 찾지 않는다면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중학생 시절 아빠는 당시 엄마의 존재를 몰랐지만 엄마와 결혼한 지 30년이 지난 현재의 아빠는 엄마를 알아서, 모든 걸 알면서도 엄마를 찾아갈지, 아닐지를 망설였다 했다. 그 순간 어렴풋하게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아빠는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다른 삶의 가능성도 생각해본 거구나.


   아빠가 꺼낸 말은 내게 몹시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들렸는데, 내 대답은 그와 달리 서툴고 말았다. 그래서, 찾아갔어요? 무언가를 해명하는 사람처럼 조금 커진 소리로 아빠는 말을 맺었다. 아니, 꿈이  아니라서 찾아가고 안 가고가 없어. 찾아가야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야. 목소리의 여운이 길었다.



   이렇게 적고 나니, 아빠는 나보다 훨씬 내게 자신의 속내를 ‘아빠’ OOO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아빠 ‘OOO’으로 말하기도 했다는 걸 느낀다. 자식을 위해 사는 아빠가 아니라, 자식과 함께 사는 아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엇을 고민하며, 풀리지 않는 어려움에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 고스란히 말해주는 아빠. 혹시나 내 반문이 아빠에게는 얼른 다시 ‘아빠’ OOO으로 돌아오세요 라는 청원처럼 들리진 않았을까, 문득 죄스러워진다. 


   아빠의 분더카머. 어제 우리가 나눈 문장은 고작 여기에 적은 것이 전부인데 거기에서 뻗어져 나온 잔가지 같은 문장이 이렇게나 길어졌다. 분더카머는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어떤 고요한 파문을 일으키는구나, 라는 생각도 함께 든다. 나의 분더카머를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해줄 사람이 있는가. 룽설은 나의 분더카머를 모두 보고서도, 여전히 내 옆에 변함없이 서 있을 수 있을까. 이 더럽고 불쾌한 분더카머를. 끝내 모욕하지 않고서 마주 봐줄 수 있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의문하고 의문한다. (2021. 8.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