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식 Feb 16. 2022

공간과 감각

공간과 감각



   모처럼 다른 공간을 찾았다. 작년에 이곳을 발견하고 무척 좋아했던 장소, 그곳에서는 바람도, 사람의 걸음도, 떨어지는 낙조도, 시간의 흐름도 모두 느리게 가는 것 같았던 비현실적인 곳. 서울대학교의 작은 언덕이다. 이곳이라면 내 ‘비밀장소’라든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은 곳. 그곳을 오랜만에 다녀왔다.


   아무도 없었다면 이번에도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여러 생각들을 넘나들면서 남겨두고 싶은 상념이나 손에 쥐고 싶은 문장을 다이어리에 끄적였을 텐데, 아쉽게도 내가 하고 싶은 그 일을 먼저 누군가가 그곳에서 하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 타인에 대한 경계가 전보다 더 심해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이 누리고 있는 고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 고요가 한없이 충만해 보여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대신 다른 전략을 세웠다. 어느 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기보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다른 공기를 경험해보자는. 그리고 나는 곳곳을 돌아다녔다. 끊임없이 연결되는 물처럼, 내 앞에 펼쳐진 바다에서 강으로, 강에서 실개천으로, 도로와 골목 사이의 길로,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건 나는 계속 스며들고 있었다. 어느 곳에 정착하고서 그곳만의 분위기와 정취를 감각하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목적지 없는 이동 상태, 정착하지 않고 움직이는 상태여도 충분히 좋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그때 했다. 고요가 주는 충만감은 아니라 해도, 시시각각 달라지는 햇볕의 각도, 옅어졌다가 짙어졌다가를 오가는 빛의 농도, 건물의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적절한 서늘함 같은 것을 나는 이동하면서 느꼈다.


   언덕과 공원을 차례로 지나 지하철 역에 이르러서 나는 룽설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 이제 다 놀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논 것 같았다. 굳이 요한 호이징가를 끌어오지 않아도, 오늘 내가 보낸 시간이 놀이라는 걸 저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춰 떠올렸을 것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어둠이 깊이 내린 밤, 이 놀이를 노트에 새기다 보니, 그렇게 어디론가를 향해 걷고 있을 때 본, 지금쯤 어둠에 몸을 숨겼을 버드나무 한 그루가 눈에 아른거린다. (2020. 5. 21. Thu)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