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침부터 오락가락하던 눈은 정오가 되자 제법 굵은 눈발로 바뀌어 쌓이기 시작했다. 백조 다방에 들어선 유성준은 멈추어 서서 어깨며 머리에 내려앉은 눈을 털었다. 눈이 바닥에 떨어져 얼룩을 만들자 종업원이 재빨리 다가와서 걸레질을 한다.
유성준은 발에 묻은 눈이 또 여종업원의 일거리를 만들까 봐 한참을 털어내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다방 안에는 크리스마스캐럴이 울려 퍼지고 격자 창틀에는 눈이 쌓여 제법 운치가 있었다.
난로 옆에 모여 앉아 있던 사람들이 창을 흘끔거리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즐거워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크리스마스다. 눈 때문에 행인들도 뜸해진 거리 풍경은 그대로 봉투에 넣어 부치면 크리스마스카드가 될 것 같았다.
어디선가 이 추위에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건 말건 다방 안에는 신문물을 즐기는 낭만이 가득하다. 다방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무리의 남자들이 유성준을 향해 손을 흔든다. 유성준도 반갑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갔다.
테이블 위에 있는 재떨이에는 이미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모인 지 한참 된 모양이었다. 유성준이 곁에 가서 앉자 그들 중 한 명인 시인 김은천이 대뜸 이본느를 아느냐고 물어본다.
“이본느? 웬 불란서 여자인가? 이본느라는 이름은 불란서에 흔한 이름 아닌가?”
“아니 이 친구 정말 이본느를 모르는 모양이네. 요즘 경성에서 한다 하는 사내치고 이본느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대일 은행 장남인 유성준이가 이본느를 모른다니 이거, 이거 정말 부끄러운 일일세.”
유성준을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아버지 이름을 모르는 아들을 보듯 어떻게 이본느를 모를 수 있느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성준은 이본느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뜻 모를 웃음만 흘리며 어떤 여자이기에 이 난리들이냐고 물었다. 먼저 이본느에 대해 말을 꺼낸 김은천이 알려주겠다고 나섰다.
“자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 본 적 있나?”
“아니 내가 자네 같은 문인도 아니고 어떻게 희곡까지 읽어 봤겠나. 차라리 연극을 봤느냐고 물어보면 또 몰라. 동경에 있을 때 우리 학교 연극부에서 살로메를 공연했었지. 그런데 내용이 너무 문란하다고 공연 하루 만에 학교 측에서 중단시켰어.”
김은천은 황홀한 표정으로 손을 치켜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맞아 그 데카당스의 지침서라고 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떠올리면 돼! 이본느는 살로메 같은 여자야. 헤롯왕의 생일 축하연에서 모든 이들을 홀리는 황홀한 춤을 추는 살로메를 한 번 떠올려보게.”
말을 중단한 김은천은 벌떡 일어서더니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허리를 어색하게 흔들었다. 그 꼴을 본 사람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은천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가슴골과 둔부가 보일 듯 말 듯하게 비치는 옷을 입고 허리를 흔드는 여자는 뇌쇄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그런 몸놀림은 우리 남자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헤롯왕도 살로메에게 눈이 멀어 그녀의 청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이본느 앞에선 남자들은 그녀에게 무엇이든 다 가져다 바치겠다고 난리야. 하지만 오직 세례자 요한의 목을 원하던 살로메처럼 이본느는 남자들을 애가 타게만 만들 뿐 받아들이지를 않아. 내 지금껏 숱한 모던 걸을 보아 왔지만 이본느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완전 요부야, 요부!”
“그럼 이본느가 무희인가? 지난번에 경성 공연을 왔던 이시히 바쿠 같은 여자야?”
“어허, 이 친구는 문학적 표현을 그렇게 못 알아듣나. 이본느가 살로메처럼 춤을 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뭇 남자들의 마음을 울린다는 거지!”
“그래? 그럼 이본느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던 살로메처럼 누구 목을 달라고 했나?”
“어이쿠, 이 친구 정말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이본느가 살인귀야? 누구 목을 달라고 하게?”
“그럼 이본느가 왜 요부야?”
김은철과 유성준의 대화를 듣고 있던 피아니스트 홍정순이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이보게, 김 군이 이본느가 요부라고 하는 것은 이본느에게 치근대다 거절당해서 저러는 거야. 김 군은 하여간 문학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매사를 너무 시적 과장으로 몰아가요. 그러다 곤란한 설화를 자주 겪으면서도 그 버릇을 못 고쳐서 탈이지. 내가 보기에 이본느는 칼리오페 같은 여자야.”
“살로메가 아니라 칼리오페? 칼리오페는 또 누굽니까?”
“칼리오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딸 중 첫째라네. 그 딸들이 뮤즈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뮤즈 말이야. 우리 김은천 군에게도 이본느는 확실하게 뮤즈지. 지난번에 김 군이 동인지에 발표한 시 속의 그녀는 바로 이본느거든. 신화에서 시를 관장하는 칼리오페는 주로 손에 책이나 종이 따위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지. 내가 왜 이본느가 칼리오페라고 하는지는 그녀를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을 본다면 당연히 성준이 자네도 이본느가 칼리오페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때 좌중에 있던 누군가가 손뼉을 치면서 끼어들었다.
“역시 홍 군은 통찰력이 좋아. 우리는 이제 이본느를 칼리오페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나의 칼리오페여! 부디 제게 영감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