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치파오처럼 목이 올라오는 검은색 비로드 원피스는 피부 노출은 최대한 자제하고 대신 몸의 선을 노출시켰다. 그렇게 피부를 감추어 놓은 탓에 깃 위로 올라온 가는 목과 팔꿈치 아래로 살짝 드러난 팔목은 도드라져 보이고 허리선과 엉덩이로 흐르는 굴곡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깨에 걸친 밍크 숄도, 구두도 모두 검은색이다. 이본느는 감추어 드러내는 것을 즐기는 것일까. 단 하나의 색, 입술의 붉은색은 검은색 덕분에 더욱 살아난다.
숄에 손을 얹은 이본느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와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쳤다.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들은 다들 이본느의 손등에 키스만 할 수 있어도 무릎을 꿇을 것만 같은 기세로 이본느를 환영했다.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말에서 내리는 귀부인의 발에 흙이 묻을세라 진흙 바닥에 자신의 몸을 누이는 중세의 기사처럼 보였다.
“이본느, 오늘은 다른 날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데.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파티를 계획한 모양이오?”
“글쎄요, 크리스마스 파티라고 하면 파티일 수도 있지만 즉석 연극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었어요.”
“무슨 연극을?”
“크리스마스에 무슨 연극을 하겠어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캐럴』이지요!”
“오호라 그거 멋지겠는데. 그나저나 이본느! 호남 제일의 부잣집 아들이 당신을 모른다기에 데리고 왔으니 눈도장이나 좀 찍어주시오. 여기 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앉아있는 친구는 유성준이라고 호남 부호인 대일은행 사주 유철호 회장님의 장남이라네.”
이본느가 비단 장갑을 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유성준이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묘하게 얽혔다. 처음에는 탐색하는 듯 조심스럽게 살피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곧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과감해졌다.
누군가 “뭐야! 악수를 왜 이렇게 길게 하는 거야”라고 소리 질렀지만 실제로 약 십 초쯤 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의 눈동자를 통해 상대방의 영혼까지 휘저을 만큼 격렬하게 얽혀들었다. 감정선이 예민한 예술가들이었던 터라 방금 그 자리에서 일어난 화학반응을 눈치챈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이본느가 그런 관심을 기울이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외면하고 있었다.
“연극을 하려면 먼저 대본이 있어야 하잖아.”
“여기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캐럴』 내용 모르는 사람 있나요?”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모른다는 소리가 하기 싫은 몇몇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이본느는 그들의 표정을 보더니 아무래도 자기가 내용을 다시 들려줘야겠다며 상석인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녀가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면서 홍정순이 유성준에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이본느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들려주는 마법을 가졌어. 지금부터 이본느의 살롱에 진정한 매력에 빠져보라고.”
이본느의 현란한 수사법은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의 모습을 그 자리에 재현해 놓는 듯했다. 비쩍 마른 얼굴에 매부리코, 돈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을 날카로운 눈, 남들에게 험한 말을 일삼는 비틀린 입을 가진 서양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노인이 조카와 직원인 밥에게 크리스마스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할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같이 저런 영감탱이라는 말로 추임새를 넣었다. 스크루지가 불꽃처럼 과거를 비추는 유령, 현재를 화려하게 즐기는 유령, 두려움을 가득 안고 있는 미래의 유령을 따라 다니며 보고 듣는 것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같이 겪었다.
그건 마치 내가 스크루지는 아니므로 직접 겪을 필요는 없지만 옆에 같이 따라 다니며 안전하게 구경하는 것만 같은 경험이었다. 사랑을 나누고 사는 것에 대해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된 스크루지가 직원 밥의 급료를 올려주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때 듣고 있던 사람들도 같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쳤다.
이야기를 끝낸 이본느가 잠시 침묵하더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건 변화와 구원에 관한 이야기예요.”
“젊은 당신이 변화와 구원에 대해 무얼 좀 알기는 아는가?”
유성준이 웃음기 머금은 얼굴이었지만 그러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시비조의 억양으로 질문했다.
“알지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에 비해서는 많이 알 거예요. 입으로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스크루지 영감을 비난하지만 실제로 오늘처럼 추운 날 거적때기 하나만 걸친 채 버텨야 하는 사람들이 이 종로 근처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분들에 비하면 많이 알 거예요.”
“흠, 이렇게 호화로운 장식으로 둘러싸여서 따뜻한 난로와 향기로운 술과 음식을 앞에 놓고 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지요.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크리스마스가 파티만 하는 날이 아니라는 것. 콧김까지 얼어붙는 날 혹시 그대로 놔두면 얼어 죽을지도 모를 사람들과 같이 온기를 나누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이거 우리가 또 이본느한테 당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아이고! 진짜 이본느는 왜 이렇게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이본느가 우리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우리는 더욱 몸이 달아오르는 줄 알고 그러는 거겠지. 그렇지? 이본느.”
이본느가 눈을 깜빡이며 웃는다. 마치 알긴 뭘 아느냐는 순진한 표정이다. 좀 전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의 허를 찌르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변화와 구원에 관해 이야기하던 강한 여자는 사라지고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이 보호해주어야 해요, 하는 표정이다.
그녀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지더니 분홍색 혀가 살짝 드러났다. 촉촉하게 젖은 혀가 진줏빛 치아 사이에서 나오려다 말고 재빨리 숨어 버렸다.
“저 같은 여자가 어떻게 경성 최고의 예술가인 여러분을 괴롭히겠어요. 과한 말씀이세요.”
말을 하던 이본느의 시선이 사람들의 머리를 넘어 소파 뒤쪽으로 넘어갔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사람들의 몸도 틀어졌다. 거기 백조 다방에서 화를 내고 나갔던 민영식이 눈사람처럼 하얗게 변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눈을 너무 많이 맞은 모양이었다. 다들 그런 민영식의 모습에서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누군가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극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들이 일어나면서 온몸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리도록 움직이지 않고 있는 민영식을 흘끔거렸다.
“혼마치는 아들이 저러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나?”
눈매가 유난히 날카로운 사내 하나가 민영식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혀를 찼다. 바닥에 깔린 카펫이 민영식의 몸에서 흘러내린 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시위하듯 꼼짝 않고 서 있는 민영식에게 수건을 가져다주고 위스키 잔을 건네준 사람은 유성준이었다. 본이 앞에서 사람들은 민영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일전에 민영식이 많은 사람 앞에서 너 따위를 첩으로 삼지 못하면 내가 민영식이 아니라며 술주정을 하다 본이에게 뺨을 맞았다.
그런 터이니 다른 곳도 아닌 살롱 안에서 민영식에게 호의를 베풀려면 본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유성준은 민영식을 끌어다 자기 옆에 앉히고 이야기에 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김은천이 크리스마스 캐럴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이본느가 이야기하는 크리스마스 정신을 상기시키기에는 크리스마스 캐럴 보다는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좀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했다. 거기에서 이야기가 갑자기 동화 쪽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우리나라의 전래동화 콩쥐팥쥐전이 서양의 신데렐라보다 더 나은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열거했다. 그러자 잡다한 지식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신일성이 본래 신데렐라는 9세기 중국 당나라의 유양잡조에 ‘섭한’이라는 이름으로 실렸던 이야기임을 상기시키며 동양의 문화가 우수함을 이야기했다.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다물고 있던 민영식이 나섰다. 동양의 문화가 우수한 것은 사실이니 우리가 불란서나 독일, 미국 같은 나라가 아니라 동양의 자존심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냐고 말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본이가 민영식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는 순간 홍정순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다들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홍정순을 따라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