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왁자지껄 몰려간 사람들이 종로 일정목에서 광화문 동쪽에 있는 샛길로 들어섰다. 종로 일정목의 번화한 상가 뒤쪽으로 난 샛길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 골목 끝에 위치한 작은 건물 앞에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가정집 같기도 하고 사무실 같기도 한 일본식 건물 입구에는 소박하게 생긴 나무 간판만 하나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철제 기둥에 고리를 달아서 걸어 놓은 간판에는 ‘Salon d'Yvonne’라는 글씨가 작게 새겨져 있었다.
“여기가 바로 우리의 칼리오페 이본느의 살롱일세!”
“아니라니까! 여기야말로 우리의 요부 살로메 공주의 궁전일세!”
그들이 앞 다투어 건물 쪽으로 손을 뻗으며 살롱을 소개하는 소리를 들으며 유성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선으로 돌아와 보낸 지난 시간이 그 문 앞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유성준의 상념을 깬 것은 허세를 부리기로 치면 경성에서 따라잡을 사람이 없는 소설가 신일성의 아는 척 때문이었다.
“살롱의 역사로 말하자면 클로드 뒤롱이 정확하게 말했지. 글쓰기 이전에 말하기가 있었고 창작 이전에 대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곧 살롱이었다고 말이야. 17세기부터 불란서에서는 아름답고 지적이며 권력까지 가진 부인들이 살롱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했지. 특히 우리처럼 창작하는 남자들의 두뇌를 말이야. 그런데 경성에 생기는 살롱들이란 죄다 양주집의 다른 이름이었는데 우리의 이본느가 진짜 살롱을 만들었어.”
신일성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대부분 불란서와 영미의 여러 경구인데 책을 읽다가 경구나 인용할 만한 말들이 나오면 수첩에 적어서 외운다고 했다. 다들 그러한 신일성의 허세에 코웃음을 치지만 그가 쓰는 소설들이 제법 인기가 좋아 술값을 자주 내는 덕분에 따돌림을 당하지 않고 어울렸다.
누군가 짓궂게 클로드 뒤롱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신일성의 얼굴이 벌게졌다. 클로드 뒤롱이 뭐 하는 사람인 줄 아무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신일성이 쩔쩔매는 것은 다들 재미있어했다.
서너 개의 돌계단 위에 바로크식 기둥으로 된 문설주가 세워져 있었다. 나무에 옅은 갈색을 입힌 문은 반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유리 겉에 주물로 된 넝쿨식물 장식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따뜻하게 보이는 붉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홍정순이 그 문을 능숙한 자세로 열자 사람들이 몰려 들어갔다. 문을 열자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가 열린 듯 긴 복도가 펼쳐졌다. 바닥에는 푹신하게 들어가는 자줏빛 카펫이 깔려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눈 속에서 강아지처럼 뛰어놀다 들어온 탓에 발이 지저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춤거렸다.
함부로 밟아 더럽히기에는 너무나 고급스러운 카펫이었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보이가 재빨리 뛰어나와 입구에 발을 닦고 들어갈 또 다른 카펫을 깔아 주었다. 복도에는 샴페인 골드빛 벽지가 붙어 있고 양쪽 천정 귀퉁이에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어슴푸레하게 켜져 있었다.
몇 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금장 사각 대에는 커다란 화병에 꽃이 꽂혀 있기도 하고 인상파 화가의 복제화가 올라 있기도 했다.
일본의 우키요에에서 영향받은 고흐나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일본에서 인기를 끌자 정교한 복제화들이 유통되었다. 이 정도 수준을 가진 복제화들은 아무리 복제화라도 가격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화가인 이종필은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욕지기가 난다며 투덜거렸다.
이본느의 살롱은 다 마음에 드는데 이놈의 복제화를 볼 때마다 기분이 상한다며 자신이 무료로 이곳을 장식할 그림을 선물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또 하나의 문을 열었다. 이번 문은 밖에 있던 나무문보다 육중한 철문이었다. 문 안에서는 유성기를 통해 발랄한 왈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홍정순이 고개로 리듬을 타면서 이 음반은 자신이 독일에서 들어올 때 가지고 온 것인데 특별히 이본느를 위해서 선물한 것이라고 자랑한다.
살롱은 마치 커다란 서양식 주택의 거실 같았다. 천장의 크리스털 샹들리에 외에도 구석마다 스탠드가 은은한 불빛으로 따스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바닥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의 카펫이 깔려있고 넉넉하게 공간을 띄워 놓은 테이블과 탁자들은 그곳에 앉는 사람들을 귀족으로 느끼게끔 만들어줄 고급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출입문을 마주 보는 곳에는 무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단상이 있었는데 그 정도 무대면 웬만한 간이 연주회나 연극도 올릴 수 있겠다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벽이었다. 사방이 책꽂이로 만들어진 벽에는 조선 땅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책이 다 꽂혀 있을 법하게 많은 책이 있었다.
책 좀 읽는다 싶은 사람들은 이곳이 천국이라고 여길만한 장소였다. 누구라도 이 공간에 들어오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여주인에게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한 무리 남자들이 이야기에 열중해 있다. 조심스럽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봐서 일본인들이었다. 일행 중에 두어 명이 달려가 인사를 한다. 인사를 마치고 온 이종필이 경성제국대학 일본인 교수들이라고 알려준다. 아직 이본느는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서 카펫을 가져다주었던 보이가 인원이 많은 것을 보고 중앙에 가장 넓은 자리로 안내한다. 다들 오늘 같은 날은 가벼운 위스키 한 잔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떠들어댄다.
이 사람 저 사람 입에서 이본느가 튀어나온다. 위스키가 한 잔씩 돌아가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다들 집중하지 못한 채 카운터 뒤쪽만 흘끔거리고 있었다.
이본느는 모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카운터 쪽의 문이 아니라 복도 출입문에서 들어왔다. 그녀는 보브 스타일의 짧은 단발머리에 리본 밴드를 두르고 있었다.
밴드는 이마를 가리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크고 검은 눈동자가 흑요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눈 주위에는 아이라인을 가늘게 그리고 마스카라를 칠해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