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크리스마스 이브

프롤로그

by 은예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담배만 연신 피워대고 있던 민영식이 벌떡 일어나며 일본어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본느를 요부라고 했던 김은철도 뮤즈라고 했던 홍정순도 싸잡아 되먹지 못한 소리를 한다고 욕을 해댔다.


“네까짓 것들이 뭔데 이본느에 대해서 왈가불가야!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이본느가 요부니 뮤즈니 떠들어봐. 다들 닥치는 대로 죄를 만들어서 구치소에 가둬버릴 줄 알아. 이 거지새끼들 같으니라고.”


민영식은 고함을 치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의자를 발길로 걷어차며 다방을 나갔다. 어찌나 거칠게 문을 여닫고 나갔는지 민영식이 나간 후에도 한참 동안 문에 달린 종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유성준은 그런 민영식의 뒷모습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저 친구 처음 보는 친군데 누구인가?”


누구 하나 민영식을 욕하는 사람 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어떤 이는 무거운 한숨을 쉬고 또 누군가는 낮은 목소리로 진짜 한심하다고 중얼거렸다. 그 비아냥거림은 민영식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지금 아무 소리하지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들을 향한 것으로 들렸다. 이본느를 흉보거나 칭송하면서 무르익었던 유쾌한 분위기는 유성준이 눈썹에 달고 들어온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민영식이라고 총독부 혼마치 경무국장의 양아들이야. 사이토 총독이 삼일 만세 이후에 총독부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관리들에게 조선인 양아들을 들이라고 권했다고 하지 아마. 그런 과정에서 일찌감치 경무국장 집에 들어가 살았다고 하더군. 지난 사월에 총독부 경무국 산하에 도서과라는 부서가 새로 생겼어. 전에는 고등 감찰과에서 하던 검열 업무를 맡은 곳이 바로 도서과야. 신문이나 잡지,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검열할 수 있는 곳은 다 검열하는 곳이 바로 도서과지.”


홍정순은 착잡한 얼굴로 말을 중단하고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말을 시작할 때까지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저 친구는 도서과에 상근 근무자는 아닌데 업무 협조라는 명목으로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해. 만약 저 친구한테 잘못 보이면 우린 시 한 편, 잡문 한 줄 발표할 수 없어. 그뿐인 줄 알아? 연주나 전시를 위한 장소 대관조차 불가능해져. 그러니까 저 친구가 거지새끼라고 하면 그냥 거지새끼 노릇을 하는 수밖에 없지. 어때 재미있지? 우린 저 친구랑 놀아주고 저 친구는 우리가 검열을 덜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자네는 좋겠네. 호남 최고의 갑부 아버지를 두고 있으니 돈 걱정을 하겠나, 우리처럼 발표 때문에 저런 호래자식 앞에서 쩔쩔맬 필요도 없으니 말이야.”


“그런데 저런 위세 있는 친구가 왜 이본느 때문에 이토록 불같이 화를 내나?”


김은철이 통쾌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이본느 앞에서 그 위세가 통하지 않았으니까. 으하하!”

“이본느가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야?”

“그렇지, 아 저 자식이 성내는 꼴을 보니 갑자기 이본느가 더 보고 싶은데. 우리 이본느한테 가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지 않겠나?”


유성준이 그다지 당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본이와 재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고 없이 들이닥치면 이본느가 싫어하지 않나?”

“무슨 소리, 이본느의 살롱은 항상 열려 있다오! 단지 민영식처럼 그 살롱 문을 닫고 저 혼자 이본느를 차지하려고 들지만 않으면 이본느는 우리를 언제나 환영하고 우리와 같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뮤즈께서 경성 최고의 지식인들을 어찌 거절하겠어.”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코트를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섰다. 이본느의 살롱이 있다는 종로 쪽으로 나가자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나온 연인들로 거리가 복잡해졌다.


“아니 언제부터 예수님이 탄생하신 기독교 명절이 이 땅의 남녀들이 데이트하는 날로 바뀐 건가?”

“그걸 내 어찌 알겠어. 우리 마누라며 자식들이 제비 새끼들 마냥 입을 벌리고 선물 타령을 해서 내가 아주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었다니까.”

“성준이 자네한테는 부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또 뭐가 부러운데?”

“자넨 결혼도 안 했잖아. 다들 그놈의 조혼 풍속 때문에 일찍 결혼한 마누라랑 사네 못 사네 난리 치는 판에 자네는 자유롭게 연애를 해도 상관이 없잖아.”

“나는 연애 같은 것 하지 않네.”

“진짜야?”

“그렇다니까?”

“그럼 도대체 뭘 하나? 혹시, 혹시 말이야…….”


짓궂게 달라붙어 농지거리하는 김은철의 태도가 점차 진지해지자 유성준은 은근히 긴장되었다.


“혹시 뭘? 내가 우리 집안의 치열한 후계 다툼 때문에 정신없는 거 몰라서 하는 말인가?”

“후계 다툼에 최고 약은 결혼 해서 아들을 아버지 품에 떡하니 안겨 주는 건데 자네는 그걸 하지 않잖아. 그래서 혹시 남색이 아닌가 생각했지.”

“뭐라고?”


유성준은 김은철의 엉뚱한 말에 안심이 되어 과장된 목소리로 웃었다. 누군가 눈밭에 나온 강아지처럼 뛰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놀리며 웃자 넘어진 이가 눈을 뭉쳐 던졌다. 삽시간에 어린애가 되어 눈싸움을 시작한 이들이 들뛰면서 종로를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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