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선물

프롤로그

by 은예진


손님들이 떠난 빈 살롱에 이본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보이들이 이본느 눈치를 살피며 청소를 마치고 서 있다. 정신을 차린 이본느가 카운터 안에 넣어 놓은 봉투를 꺼내 하나씩 나눠 주었다.


“선물보다는 돈이 나을 테지요? 다들 수고 많았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보이들 중에 우두머리 격인 자가 나서서 대표로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마담도 메리 크리스마스 되십시오.”


그들마저 돌아간 살롱에 불을 모두 끄고도 이본느는 안채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기다리다 못한 시월이가 데리러 들어왔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다.


“에구머니나! 아씨 지금 뭐 하시는 거래요?”

“응?”


시월이가 불을 켜자 이본느가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빛을 가린다.


“왜 이러고 계신데요. 어서 들어가세요.”


이본느는 멍한 얼굴로 시월이를 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그분을 기다려야 해!”

“그분이라니요?”

“오늘 유 선생님이 다른 손님들이랑 왔었어.”

“네? 정말요? 아니 그 양반은 우리 아씨가 목 빠지게 기다린 거 뻔히 알면서 그냥 그렇게 갔단 말이에요?”


이본느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살롱 문을 열어 놓고 하루도 기다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 사람은 정말 자신에게 일말의 다른 감정이 없었던 것일까? 오직 김석중 선생의 말씀을 따르느라 했던 일일 뿐일까?


시월이는 이본느 옆에 의자를 빼고 털썩 앉는다.


“그래서 지금 혹시 그 양반이 다시 오지 않을까 싶어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계신 거예요?”


이본느는 고개를 숙여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하지 못한다.


“그동안 어디서 뭘 하느라 코빼기도 비추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 모른 체하는 사람이 지금 오겠어요? 안 와요. 오려고 했으면 꼭 오늘이 아니어도 올 수 있는 건데 안 왔잖아요. 그러니 그만 포기하고 들어가요.”

“너 먼저 들어가. 나는 오늘 어차피 안에 들어가도 잠자기는 글렀어. 그러니 내버려 두고 가.”

“아씨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내가 잠이 와요?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자고요.”


시월이는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 자기도 여기서 버티겠다고 탁자에 머리를 대고 엎드렸다. 그렇게 엎드리자마자 가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이본느는 그런 시월이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난로에 불은 꺼졌고 실내는 찼다. 이본느는 시월이의 어깨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어서 들어가자. 내가 졌으니 들어가서 자자. 여기서 이러다가 고뿔 든다.”


이본느가 깨우자 엉겁결에 일어난 시월이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요란하게 했다.


“진즉에 그러실 일이지. 어서 들어가셔요.”

“너 먼저 들어가. 나는 문을 잠그고 들어갈게.”


시월이가 여느 때 같으면 제가 잠그겠다고 하겠지만 잠에 취해서인지 알았다고 고개를 저으며 비틀거리고 안채 쪽으로 들어갔다. 이본느는 복도를 천천히 걸어 출입문 쪽에 섰다.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는 모양이었다. 유리창 밖으로 함박눈이 바람 때문인지 비스듬히 내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찬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들어왔다. 놀란 이본느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문 밖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녀가 문을 열자 놀라서 뛰쳐나가는 것 같았다. 그냥 돌아서려니 추위에 떨고 있던 고양이인가 싶어 마음이 쓰였다. 이본느는 다시 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밀었다.


“유 선생님?”


하얗게 눈에 덮인 유성준이 담벼락에 기대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깨며 머리에 쌓인 눈으로 봐서 꽤나 오랜 시간 그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본느는 그대로 유성준의 품을 향해 달려들었다. 숄도 걸치지 않고 나온 이본느의 등 위로 유성준의 어깨를 덮고 있던 눈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이본느를 품에 안은 유성준은 끝내 돌아서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본느가 살롱 안에서 유성준을 기다리는 동안 유성준은 눈 내리는 문 앞에서 이본느를 기다렸다.


그녀를 다시 만나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룬 시간 끝에 만난 그녀 앞에서 유성준은 차마 그냥 돌아설 수 없었다.


유성준은 자신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이본느의 등에 손을 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춤거렸다. 한 번 손을 대면 멈출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의 손은 이본느의 등 언저리만 맴돌 뿐 쉽사리 그녀에게 가서 닿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에서 떨어진 눈이 그녀의 옷을 적시는 것을 마냥 바라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에 닿아 녹는 눈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본느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김은철이 이야기했던 살로메도, 홍정순이 이야기했던 칼리오페도 아닌 그의 본이가 있을 뿐이었다.


누가 먼저였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눈을 감고 까치발을 뗀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유성준이 고개를 숙인 것이 먼저인지 말이다.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가서 닿았다.


밖에서 오래 서 있던 유성준의 입술은 차갑고 단단했다. 그 차가운 입술이 이본느의 입술을 가만히 덮었다. 작고 보드라운 그녀의 입술은 유성준의 입술을 데워주기로 작정한 듯 따스한 김을 내뿜으며 열렸다. 도톰한 아랫입술은 말캉했고 인중과 맞닿은 윗입술의 뾰족한 부분은 유혹적이었다.


유성준은 그녀의 입술을 위아래로 빨다 부드럽게 혀를 집어넣었다. 입술 안쪽의 연약한 점막과 고르게 서 있는 치아와 그 속에 숨겨진 혀까지 이본느의 입속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그녀의 타액을 들이마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던 여자였던가. 그녀를 향해 달려가려는 마음을 틀어쥐느라 잠을 설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결국 지고 말았다. 그녀를 본 순간 더는 자신이 버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문을 열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인 것은 마지막 확인이었다. 그녀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이본느의 혀에 그의 혀가 닿자 두 혀가 얽혀 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의 갈증을 한꺼번에 풀려는 듯 혀는 얽혔다 다시 풀어지고 얽히기를 반복했다. 눈이 두 사람의 얼굴을 적시고 추위에 발이 얼어갔지만 두 사람 모두 그걸 느낄 여력이 없었다.


“보고 싶었어요.”


유성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다시 한번 꽉 끌어안았을 때 그녀가 얼굴을 떼어내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보고 싶었소.”

“거짓말.”


유성준이 놀란 얼굴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저를 보고 싶었다고 하시는 분이 어찌 그리 무심하실 수 있었습니까?”

“그건…….”


유성준이 무슨 말인가 하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한번 그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덮어서 막았다. 잠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기만 하고 있던 이본느가 입술을 떼고 그를 향해 말했다.


“오늘 밤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난 오늘 받은 선물을 풀고 싶어요. 들어가세요.”


사내 품에 안기기를 열망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래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유성준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을 누르느라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난, 내일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사내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곧 당신을 해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사내요. 그걸 알기에 차마 이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오.”


이본느는 유성준의 양쪽 뺨을 감싸 쥐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얼어서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저를 보세요. 내일 어찌 될지 알 수 없기에 오늘 저는 당신 품에 안기고 싶은 겁니다. 당신에게 내일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당신의 오늘을 갖고 싶은 겁니다. 그게 어찌하여 저를 해하는 일입니까. 그건 저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본느가 유성준의 손을 잡고 살롱의 출입문을 열었다. 유성준을 잡은 그녀의 작은 손은 차지만 단단했고 결의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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