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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Sep 13. 2024

52. 너랑 이런 거 못하겠다

카페 불을 환하게 켜놓은 서아는 테라스에 나와 앉아서 우혁을 기다렸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우혁이 원성태를 잡아끌고 간 모래사장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얼핏 사람 그림자가 보이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그때마다 우혁이 아니었다.


가까운 펜션에 머무르는 구 작가가 술에 취해 빨개진 얼굴로 나타났다. 서아가 근심 어린 얼굴로 혼자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왔다.


“우혁 오빠 어디 갔어요?”


구 작가가 드르륵 소리가 나게 의자를 잡아끌어다 놓고 앉았다. 추석이 지난 밤바다는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낮에는 햇볕이 따가웠지만 해가 지고 나면 바닷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낮에 카페에 왔던 이상한 손님 있잖아요. 걔가 제 고등학교 동창인데 학교 다닐 때부터 저를 좀 불편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아까 송이버섯 식당에도 따라오는 바람에 우혁 씨가 데리고 해변으로 갔어요.”


구 작가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해변가를 둘러보았다.


“설마, 우혁 오빠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요? 지금 시청률 대박이라 분위기 완전 좋은데…….”


그때 갑자기 우혁의 목소리가 그들 뒤에서 들렸다.


“걱정하지 마라. 선아야! 내가 이 바닥 밥 하루 이틀 먹니?”


서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어깨에 걸치고 있던 카디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혁은 허리를 굽혀 떨어진 카디건을 주워 들어 다시 서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괜찮은 거야? 혹시 싸우거나 한 거 아니에요? 어디 봐요.”


서아는 우혁의 팔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 서아의 모습을 보던 구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별일 없으시다니 믿고 불청객은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두 사람의 달콤한 모습은 촬영 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서 또 보는 거 애인 없는 저한테 너무 치명적입니다. 그럼 이만.”


“그래, 그럼 가서 쉬어라.”


우혁이 그녀를 붙들지 않자 걸음을 내딛던 구 작가가 멈춰서 몸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쯤 붙잡아 주시면 감사했을 텐데.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말을 하던 구 작가는 텅 빈 테라스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SNS 상에서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뭔가 급조된 느낌이 난다며 가짜 연인 설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구 작가도 처음에 살짝 의심이 들었다. 


은서아가 아무리 은장환 피디 딸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의 열애설은 뭔가 좀 이상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두 사람은 확실하게 연인 맞다. 


“치사한 강우혁! 나도 연애할 거다. 흥칫뿡!”


구 작가가 흥칫뿡을 얼마가 크게 외쳤는지 카페 안으로 들어간 우혁이 그 소리를 듣고 킥킥 웃었다. 서아는 도대체 우혁이 어떻게 원성태를 보낸 건지 궁금해서 성화를 대느라 구 작가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눈치였다.


“생각해 보니까 걔가 좀 안 됐더라고. 그 냄새 때문에 제대로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너한테 고백도 못 하는 이상한 놈이 된 거잖아.”

“그, 그렇기는 하지요.”

“액취증이 심한 사람들 봤지만 그렇게 센 냄새는 나도 처음이야. 사실 나도 약간 액취증이 있어서 수술했거든.”


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집이었으면 그 지경이 되기 전에 수술을 했어야 정상인데 수술도 하지 않고 그렇게 냄새를 풍기며 다니는 거 여러모로 사연이 있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나도 가로수길 천사 흉내를 좀 내봤어.”

“나는 나 힘든 것만 알았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어요. 부끄럽네요.”


서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야, 은서아! 너, 욕심이 너무 과하다.”


욕심이라는 말에 서아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만 천사 소리 듣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나한테 그거 하나 양보한 게 그렇게 아까워?”

“에이, 무슨 그런 말을.”


서아가 손을 내젓자 우혁이 그 손을 낚아채서 그녀를 잡아당겼다.


“네가 아무리 천사라지만 남자한테까지 천사 노릇 하는 거 못 본다.”


우혁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서아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그대로 있었다. 우혁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아 겁이 났다. 


단순하게 겁만 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 겁보다 더 큰 감정이 서아를 덮쳤다. 


‘나, 이 사람 좋아하나 봐. 어떡하지?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갑자기 바다 저쪽에서 번쩍하고 번개가 쳤다. 곧이어 우르르 쾅쾅하고 천둥이 울렸다. 후드득, 후드득 굵은 빗줄기가 카페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서아는 천둥 번개가 실제로 치는 건지 아니면 자기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실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혁이 고개를 숙여 서아의 입술을 덮었다. 서아의 손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풀렸다. 서아는 허공에 떠 있는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멈칫거리다 우혁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서아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자 우혁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자기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아의 뒤꿈치가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턱을 들었다. 우혁의 입술이 닿자 천둥소리도 빗소리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어떤 디저트도 따라갈 수 없는 달콤함이 서아의 입술을 타고 들어왔다. 우혁의 어깨를 마저 잡지 못하고 망설이던 손 하나도 올라가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열리고 불같은 욕망이 서로의 깊은 곳을 탐했다. 서아는 다리에 힘이 빠져 우혁의 몸에 매달려 가까스로 서 있을 수 있었다. 우혁이 넘어지는 그녀를 부둥켜안느라 입술을 떼면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두 사람 모두 열기에 들뜬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렇게 입술을 떼자 더욱 거세진 빗소리가 귀에 들렸다. 


“서아야!”


우혁이 서아를 안은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아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 얼굴을 비볐다. 더는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을 삼킨 그녀가 우혁의 품을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부풀어 오른 입술을 달싹이며 고백을 하려는 찰나 우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이제 너랑 이런 거 못하겠다.”

“네?”


방금 그토록 뜨겁게 자신을 안았던 남자가 이런 거 못하겠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서아는 그렇게 되물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그대로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냐? 너 뭐 하는 거니? 거절당한 거잖아. 거절당했으면 그런 줄 알아야지 묻기는 뭘 물어!’


“가짜 연애 못하겠다고. 이제 진짜 너랑…….”


우혁은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서아가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고 매달려 입술을 덮어 버렸다. 아무 말도 필요 없으니 가만히 좀 있으라는 듯 서아는 그의 입술을 막았다. 입술이 부르트도록 막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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