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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Sep 17. 2024

53. 그만두는 게 아니고 시작

JK401에서는 우혁의 매니지먼트 이외에 영화 수입 사업을 한다. 대작들 틈에 끼어 소소하게 흥행하는 좋은 영화들이 알고 보면 JK401에서 수입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장 대표는 영화 일 때문에 양양에 있지 않고 서울에서 바빴다. 


‘달콤한 너의 맛’ 촬영을 마친 우혁과 서아는 서울 집으로 오자마자 장 대표를 호출했다.


“민석아,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먹자.”

-왜? 양양에서 오자마자 피곤할 텐데 쉬지 무슨 밥을 먹재?

“할 말이 있어서 그래.”

-할 말? 야, 겁나게 무슨 할 말? 너 또 무슨 사고 친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그냥 밥이나 먹으러 와. 알았지?”

-알긴 알았는데 뭔가 계속 찜찜한데.

“짜식, 찜찜하기는. 찜찜할 거 하나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니까.”


전화를 끊은 우혁은 서아랑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오늘은 두 사람이 진짜 사귀기로 한 것을 공식 선언하는 날이기 때문에 우혁이 음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아는 우혁이 할 줄 아는 건 이미 다 먹어봤던 터라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 불안해서 계속 잔소리를 했다.


“설마 장 대표님 불러놓고 참치 김치 볶음에 조미 김 내놓을 거 아니지?”

“야, 너는 나를 뭐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냐? 내가 그동안 너한테 맛있는 거 해주려고 비밀리에 갈고닦은 레시피가 있거든.”

“레시피만 보면 뭐 하냐고 주방에서 해본 적이 없는데.”

“걱정하지 마. 내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충분히 했으니까. 이 정도 시뮬레이션이면 달에 로켓도 쏘아 올릴 수준이야.”


서아는 큰소리치는 우혁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우혁이 직접 요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인정해 주기로 했다. 우혁이 카트에 담은 재료는 볶음용 닭과 감자였다.


“감자는 집에 있는데.”

“그래? 양파는? 당근도 좀 넣으면 좋다는데.”

“아, 양파 떨어졌다. 양파하고 당근은 사야겠네.”


서아가 양파와 당근을 고르는 사이 우혁은 또 시식코너에 가서 서아 주겠다고 미숫가루를 챙겨 왔다.


“하여튼 마트만 가면 참 열심히 나를 챙겨요.”


서아가 종이컵에 든 미숫가루를 받으며 웃자 우혁이 뿌루퉁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정말 내가 마트에서만 챙겨? 다른 데서는 안 챙겨?”

“아니지. 오빠는 나를 다 잘 챙겨주는데 마트에서는 더 잘 챙겨준다는 소리지.”


서아가 우혁의 허리를 감싸며 토닥이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서 장을 보던 사람들이 보기 좋다며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우혁은 언제나처럼 마트에서 서아랑 같이 카트를 끌며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서아는 그런 우혁의 로망 때문에 너무 과소비를 한다고 투덜댔다.     



            



주방에서는 매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서아는 불안한 듯 고개를 돌려 주방 쪽을 향했지만 우혁은 괜찮으니까 절대 이쪽으로 올 생각하지 말라고 외쳤다.


“정말 안 가 봐도 되는 거야?”

“걱정하지 말라니까. 내가 아주 기가 막힌 닭볶음탕을 만들어서 너랑 민석이가 먹다 쓰러지게 만들 거니까.”

“제가 왜 쓰러집니까?”


문을 열고 들어선 민석이 자신을 쓰러지게 만들 거라는 말만 듣고 놀란 듯 물었다. 서아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손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우혁 오빠가 우리 둘한테 닭볶음탕을 해주겠다며 저렇게 열심히 만들고 있어요. 너무 맛있어서 먹다 쓰러지게 만든대요.”

“아하, 그런 말이구나. 흠, 과연…….”


민석이 불안한 듯 주방을 향해 소리 질렀다.


“우혁아, 적당히 해라. 나 안 쓰러져도 되니까 너무 애쓰지 마!”

“닥쳐. 너는 그저 먹기만 하면 되니까 입 다물고 기다려라.”


우혁은 고개도 내밀지 않고 소리만 질렀다. 민석은 피식 웃으며 손에 들고 온 봉투를 내밀었다.


“이번에 수입하는 영화가 이탈리아 영화거든요. 그래서 수입 담당자한테 이탈리아 가비아 와인을 선물 받았습니다. 서아 씨가 만드는 디저트 하고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서아가 봉투를 받아 와인을 꺼내자 연한 노란색의 와인 레이블에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여자가 프랑크 왕국의 가비아 공주였는데 잘생긴 근위병과 사랑에 빠져서 야반도주를 했답니다. 결국 붙잡혀서 왕한테 끌려갔지만 두 사람의 진실한 사랑을 깨달은 왕이 결혼을 허락하며 영지를 줬는데 그 영지가 화이트 와인 생산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와인이 가비아?”

“그렇지요.”

“와, 기대되네요. 오늘 후식으로 제가 만들어둔 말차 케이크 프레지에(fraisier : 딸기의 단면이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케이크)랑 잘 어울리겠는데요.”

“저도 기대됩니다만 오늘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기에 우혁이가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겁니까?”


민석이 주방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서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 와인 마시며 우혁 씨한테 직접 들어야 해요.”

“설마 뭐 연예계 은퇴라든지 달콤을 그만두는 거라든지 그런 건 아니겠지요?”

“그만두는 게 아니고 시작하는 거예요.”


서아는 애써 웃음을 감추며 알쏭달쏭 한 표정을 지었다.


“아, 궁금해. 진짜 궁금해서 미치겠네. 이 와인 디저트랑 먹지 말고 그냥 먼저 따야 할 것 같아요.”

“글쎄요, 닭볶음탕에 어울리는 와인은 아닌 것 같은데요?”

“노, 자고로 마리아주란 규칙이 있는 게 아니고 그 자리 먹는 음식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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